[사진=게티이미지뱅크]

300조원에 육박하는 국내 퇴직연금 시장에 오는 12일부터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도입된다. 디폴트옵션이란 가입자가 명확한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때 사전에 가입자가 지정한 상품이나 포트폴리오에 따라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제도다. 금융권에선 미국이나 호주처럼 퇴직연금 시장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5일 고용노동부와 금융당국은 디폴트옵션 주요 내용을 규정하는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퇴직연금 제도는 개인이 직접 운용해 원리금을 받는 ‘확정기여형(DC)’ ‘개인형퇴직연금(IRP)’과 회사가 운용해 퇴직 시 정해진 금액을 지급하는 ‘확정급여형(DB)’으로 나뉘는데, 이 중 DC형과 IRP에 디폴트옵션을 도입하는 게 핵심이다.

국내 퇴직연금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비해 수익률은 저조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은 295조6000억원 적립돼 있다. 1년 전(255조5000억원)보다 15.7% 늘었다. 그러나 수익률은 1~2%에 그친다. DC형 퇴직연금은 가입자인 근로자가 직접 펀드 등을 통해 적극적인 운용이 가능하지만 전문성이나 관심이 부족한 탓에 가입자 대부분이 원리금 보장상품을 선택한다. DC형과 IRP에 각각 77조6000억원(26.2%), 46조5000억원(15.7%) 적립돼 있는데 전체 적립금 중 86.4%(225조4000억원)가 원리금보장형에 쌓여 있다. 실적배당형은 13.6%(40조2000억원)에 그친다.

[그래프=아주경제]

당국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디폴트옵션을 도입했다. 연금 선진국들은 오래전부터 디폴트옵션을 도입해 연평균 6~8%의 안정적인 수익률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은 1981년부터 ‘401K’ 제도를 운용 중이며 연평균 7%대 수익률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호주는 1992년 ‘마이슈퍼(My Super)’ 디폴트옵션, 영국은 2012년 ‘네스트(NEST)’를 각각 도입했으며 해당 국가들에선 연금 백만장자가 해마다 쏟아지고 있다.

고용부는 시행령에서 디폴트옵션 승인 요건과 상품 선정, 적용, 관리 등 세부 내용을 구체화했다. 우선 퇴직연금 사업자는 사용자와 가입자에게 제시할 디폴트옵션을 마련해 고용부 소속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고용부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 가능한 상품은 △원리금보장상품 100% △펀드 상품(TDF, BF, SVF, SOC) 100% △원리금보장상품과 펀드 상품을 혼합한 포트폴리오 유형으로 구분된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승인받은 디폴트옵션을 사용자에게 제시하게 되며, 근로자는 그중 한 가지 상품을 본인의 디폴트옵션으로 선정하게 된다. 4주간 운용 지시가 없을 때는 퇴직연금 사업자에게서 ‘2주 이내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해당 적립금이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된다’는 통지를 받게 되며, 통지 후에도 2주 이내에 지시가 없을 때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된다. 

정부는 가입자의 선택권 보장과 사업자 간 경쟁 제고를 위해 디폴트옵션 운용 현황과 수익률을 분기별로 공시할 예정이다. 또한 3년에 1회 이상 정기 평가해 승인 지속 여부를 심의할 방침이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그간 퇴직연금 제도는 낮은 수익률 문제 등으로 근로자 노후 준비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이번 디폴트옵션이 근로자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중은행들, 디폴트옵션 도입 맞춰 조직 확대…서비스 마련 분주

[사진=고용노동부]

디폴트옵션이 본격 도입되면 퇴직연금 시장에서 시중은행 간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전망이다. 실적배당형으로 대규모 자금이 이동하면서다. 시중은행들은 조직개편 시 퇴직연금 부문을 키우는가 하면 인공지능(AI) 기술 도입으로 보다 정교한 퇴직연금 모델을 제시하고 나섰다.

신한은행은 ‘국내 퇴직연금 유치 1위 은행’ 아성을 지키기 위해 플랫폼 고도화에 집중한다. 신한은행은 쏠리치 퇴직연금 플랫폼을 통해 AI 기반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제공 중인데 초개인화된 퇴직연금 전용 플랫폼으로 거듭난다는 목표다. 신한은행의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액은 30조1787억원으로 11년 연속 은행권 1위다.

KB국민은행은 지난 4월부터 16억원의 예산을 들여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대응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국민은행은 업계 최초로 DC형과 IRP 가입고객을 대상으로 1대1 맞춤형 ‘퇴직연금 자산관리 컨설팅센터’를 운영 중이다. 자산관리자격증을 갖춘 전문 프라이빗 뱅킹(PB) 인력이 리밸런싱 등 고객별 맞춤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차별화 요소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말 기준 27조3672억원 규모의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고 있는데, 신한은행에 이어 둘째로 큰 규모다.

하나은행은 업계 최초로 찾아가는 컨설팅 서비스를 도입했다. DC형 제도를 운영 중인 기업 임직원들에게 퇴직연금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상품 라인업 다양화에 힘쓰고 있다. 지난해 11월 은행권 최초로 ‘퇴직연금 상장지수 펀드(ETF)’를 출시해 그간 증권사에서만 가능했던 투자방법을 적용했다. 

지난 4일 조직개편을 단행한 우리은행은 디폴트옵션 도입에 발맞춰 연금고객의 수익률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연금고객관리센터’를 새로 열었다. 센터는 고객관리기획팀, 수익률관리팀, 앤서백(Answer-Back)팀으로 구성되며 고객의 연금 수익률 극대화를 위한 전문상담과 비대면 연금업무 지원 역할을 수행한다. 대면·비대면 채널별 전문적인 연금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확대되는 퇴직연금 시장 속 영업경쟁력을 확보해 나갈 예정이다.

시중은행들이 너도나도 퇴직연금 시장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저조한 수익률로 인한 위기감 때문이다. 전국은행연합회 소비자포털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국내 5대 시중은행의 올 1분기(1~3월) DC형과 IRP 수익률은 겨우 1%대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리금보장형 상품 쏠림 현상이 극심한 탓도 있지만 은행들은 증권사나 보험사보다 유독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은 편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DC형 수익률을 따져보면 증권사인 미래에셋증권 5.77%, 삼성증권은 5.42%를 기록했다. 반면 시중은행의 실적은 반토막 수준이다. 신한은행은 2.19%, KB국민은행 1.86%, 하나은행 2.12%, 우리은행 2.21%다.

은행들은 디폴트옵션 도입을 발판 삼아 분위기를 반전시키겠다는 각오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물가상승과 주식 시장 침체로 수익률이 악화하고 있지만 은행의 퇴직연금 상품 라인업도 ETF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으며, 디폴트옵션이 시행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수익률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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