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량 위기, 2023년이 더 문제

  • 부유 기뢰로 가득한 바다…선박 구하는 것도 문제

  • 철도 등 대체 경로 운송 막막

우크라이나에 2000만톤(t)에 달하는 곡물이 묶여 있다. 세계 식량난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재개가 필수적이나, 현재로서는 명확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는 흑해 항구를 열면 우크라이나의 군사·경제적 생명선이 되살아날 것을 우려하고, 미국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러시아의 주머니를 불리고 제재 완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안토니우 구테흐스 UN(유엔)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곡물의 수출 차질로 전 세계의 수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와 빈곤”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등 식품 수출을 허용하는 것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사는 수억명의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이라며 “(전쟁이) 전례 없는 기아와 빈곤을 촉발해 사회·경제적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구테흐스 총장의 발언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 확보를 위해 열린 러시아와 터키 간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나왔다. 협상에 정통한 익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항구인 오데사 항구에 대한 봉쇄를 푸는 것을 거부했다.
 
이날 회담이 끝난 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무장관은 수출품을 운송하는 선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크렘린궁은 이날 회담이 끝난 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항구 베르댠스크항에서는 부유 기뢰(바다 위에 떠다니는 지뢰) 제거 작업을 완료한 뒤 며칠 안에 곡물 선적을 재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향한 국제 사회의 불신이 깊어 이번 크렘린궁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미국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러시아가 약탈한 우크라이나 곡물이 전 세계로 팔려나갈 수 있는 점을 우려한다. 미국은 러시아가 강탈한 우크라이나 곡물을 사지 말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전보를 세계 각국에 보냈다. 미국의 경고를 받은 국가는 터키, 이집트, 리비아, 파키스탄, 인도,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등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식량 위기, 2023년이 더 문제 

우크라이나 국기가 곡물로 덮여 있다. [사진=로이터]

러시아 침공이 시작된 후 우크라이나에 묶여 있는 곡물은 2000만t 수준으로 추정된다. 세계 5위의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 전역의 저장고에는 작년에 수확한 곡물들이 가득 차 있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팔려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달 후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조만간 수확에 나서기 때문에 올해 수확한 밀 등을 수용할 저장고가 부족할 것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국제 곡물 가격의 안정을 위해 조직된 국제기구인 국제곡물이사회에 따르면 전쟁 발발 전에는 우크라이나 항구에서 매달 500~600만t의 곡물이 세계로 수출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립농업포럼의 이사인 마리아 디두크에 따르면 전쟁 초기 3개월 동안 월간 수출 물량은 기존 물량의 5분의1 수준에 그쳤다.
 
곡물 운송 통로를 이른 시일 내에 마련하지 못하면 우크라이나 곡물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큰 이집트 등의 식량난 문제는 더 악화할 수 있다. 
 
아르노 쁘띠 국제곡물이사회 이사는 “문제는 2023년”이라며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수출이 크게 제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2023년 거둘 수확량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년이 아니라 최소 2년 간의 시장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농업 부문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군이 철수한 북부 지역 일대의 농부들은 러시아군이 땅을 파고 트랙터와 트럭 등을 빼앗았다고 토로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부유 기뢰로 가득한 바다…선박 구하는 것도 문제
외교적 논의 외에도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문제는 수두룩하다. 전쟁 이전에는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약 90% 이상이 해상을 통해 이뤄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침공을 시작하고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의 주요 항구를 봉쇄했다. 또한 항구를 둘러싼 바다에는 부유 기뢰가 가득하다. 러시아가 봉쇄를 푼다고 한들 선박이 항구에 입항하기 위해서는 부유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
 
곡물을 운반할 선박을 찾는 것도 문제라고 가디언은 짚었다. 농산물은 최대 5만t을 실을 수 있는 벌크 화물선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간다. 약 2000만t의 곡물을 운송하려면 400척의 선박이 필요한 셈이다.
 
해운 회사 관계자들은 해안 주변이 부유 기뢰들로 가득해서 선박과 선원 모두에 대한 적절한 보험이 제공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러시아 정부가 해군 회랑을 사용하도록 보장한다고 한들, 선박과 선원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는 보험 없이는 섣불리 나설 해운 회사가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더구나 전쟁 위험 지역으로 규정된 국가나 수역은 항해가 제한되며 추가 보험금을 내야 통항이 가능하다. 이는 영국 런던 보험사 협회에서 규정한 것을 따르는데 JWC(Joint War Committee)는 변동이 있을 때마다 전쟁 위험 지역을 업데이트하고 그에 따라 추가 보험료를 부과한다. JWC는 지난 2월 흑해와 아조우해의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해역을 전쟁 위험 지역으로 지정했다. 선주가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 추가 보험료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가이 플래튼 국제해운회의소 사무총장은 곡물 회랑이 신속하게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그는 러시아가 침공한 뒤 20개국의 선박 100척과 선원 2000명이 우크라이나 항구에 갇혀 있었던 점을 지적하며 “선주들이 자신의 선박이 공격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운송에 나설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그런 전망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강탈한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팔기 위해 해운 회사들에 은밀한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40척 이상의 유조선을 운영하는 그리스 해운 회사의 운영 책임자는 WSJ에 “러시아가 세바스토폴, 노보로시스크, 그리고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곡물과 금속 화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화물 선주들에게 막대한 프리미엄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집트, 레바논, 리비아 등의 고객들이 “군침을 흘릴 정도로 높은 요금”을 제시하면서 화물 운송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고 전했다.
 
철도 등 대체 경로 운송 막막
철도와 도로 등 대체 경로를 통해 곡물을 수출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 철도 선로는 폴란드나 루마니아의 선로보다 넓다. 선로 규격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각 나라의 국경에 도착했을 때 곡물을 하역한 뒤 다른 기차로 실어야 한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선로 규격이 동일하기 때문에 벨라루스를 통한 운송은 폴란드를 통해 운송할 때 발생하는 상당한 지연을 피할 수 있다. 문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도운 벨라루스의 원활한 협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벨라루스는 이런 편의 제공의 대가로 서방이 가한 칼륨 비료 산업에 대한 제재 완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는 해당 사안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국무부 관리들은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 해제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도를 통한 곡식 운송이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강조한다. 반면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리들은 벨라루스를 통한 철도 운송이 유일한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WSJ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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