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마르코스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 위키피디아]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지원과 비호 아래 21년이나 필리핀을 철권 통치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지게 된 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1980년대 들어 마르코스 정권의 부정부패, 정치 탄압과 인권 침해에 대한 학생과 야권의 저항이 거세지며 사회 혼란이 지속되자 그를 오랫동안 강력히 지지해 왔던 미국도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경기 침체와 실업난, 빈부격차로 국민들의 불만은 깊어지고 필리핀의 수많은 도서지역에선 무장 공산 게릴라 세력들이 활개를 쳤다. 1983년 신부전으로 투석 중이던 마르코스 대통령의 건강까지 악화되자 반(反)마르코스 투쟁의 구심점으로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괴한에 암살되었다. 아키노의 암살은 거대한 후폭풍을 가져왔다. 활발한 대미 교역에  힘입어 순항하던 필리핀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진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는 구조조정과 대출금 상환 압박까지 시달린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마르코스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멜다의 부패와 사치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며 필리핀 국내의 반정부 여론을 부채질 했다. 마르코스는 결국 조기 선거(snap election)를 통한 정면돌파로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이 만든 부정선거라는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1986년 2월 7일 치러진 대선에서 마르코스는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미망인 코라손 아키노와 대결한다. 필리핀 선관위는 마르코스의 승리를 발표했으나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수십만의 시민들이 마닐라 시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필리핀 군부도 마르코스 지지파와 아키노 지지파로 세력이 갈렸다. 긴박감이 흐르던  필리핀 정국의 판세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것은 2월 24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입' 래리 스피크스 백악관 대변인이 낭독한 성명이었다. 미국이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코라손 아키노 여사를 공개적으로 엄호한다고 밝힌 것이다. 당시 동서 냉전시대 필리핀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는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미국은 필리핀의 정국이 유혈사태로 악화되는 것을 방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친미세력의 기반 마르코스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다음날인 2월 25일 저녁 마르코스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인 폴 렉소 상원 의원에게 조언을 구한다. "Cut and cut cleanly"(깨끗이 물러나세요). 렉소 상원의원의 단호한 어조에 마르코스 대통령은 잠시 멈칫하며 실망감을 표시했으나 곧바로 아내인 이멜다 마르코스와 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피플 파워' 혁명을 상징하는 노란색 의상을 입고 단상에 오른 아키노 여사가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라고 외치자 군중들은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반(反)마르코스 시위대는 기쁨에 넘쳐 거리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타이어를 불태웠다. 군중은 사치와 부패의 상징이던 말라캉궁으로 쳐들어가 파괴와 약탈을 시작했다. 그렇게 필리핀 역사상 최악의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세계 언론은 마르코스 일가가 떠난 대통령궁의 지하에서 발견된 수천 켤레의 구두와 고급 핸드백,  밍크 코트,  장신구 등 이멜다의 극도로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90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미 헬기와 공군기에 탑승해 고국을 탈출하면서 7억 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현금과 수백개 상자의 보석 시계 금괴 등을 챙겨온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호놀룰루 고급 식당에서 매주 일요일 파티를 여는 등 초호화 생활을 지속했다. 그의 파티에 초대된 세계 각국의 수많은 게스트들과 연예계 인사들은 마르코스와 이멜다를 현직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처럼 깍듯이 대했다. 마르코스는 생전에 자신이 필리핀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망명지에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그를 지지하는 군부대를 동원해 야당과 시위대를 쉽사리 진압할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유혈사태를 우려해 포기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미인대회 출신으로 마르코스가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을 사치와 연회에 물 쓰듯 써댄 이멜다는 권력에 대한 욕망도 남편 못지 않았다. 마르코스 재임기간 그는 보건복지부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지내면서 부정부패와 공금횡령으로  국가재정을 축냈다. 마르코스 일가는 집권 당시 부정 축재한 100억 달러(약 12조원 상당)의 재산에서 33억 달러 정도만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코스는 2000여명의 손님을 초대해 자신의 71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치른 1년 후인 1989년 9월에 눈을 감았다. 임종 시 곁에는 그의 유일한 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Ferdinand Romualdez Marcos Jr.)가 지키고 있었다. 지금 그의 나이는 65세이다. 지금 놀라운 사실은 마르코스 주니어가 다음 달 (5월 9일)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의 지지율이 50%를  훌쩍 넘기고 2위 후보인 민주화 세력의 대표이자 현 부통령 레니 로브레도(Maria Leonor Gerona Robredo)를 2배 이상 앞서고 있다.   


 

지난 4월 20일 페르디난도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가 필리핀 반타가스 주에서 유세 중 연설하고 있다.(로이터) 



남편의 사망 후 이멜다는 1991년 필리핀으로 가족과 함께 돌아와 마르코스 왕조의 화려한 컴백을 이끌고 있다. 이멜다는 귀국 후 두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2010년 총선에서 마르코스가의 전통적 기반인 북부 루손에서 아들 지역구에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내리 3선을 한 그녀는 지금 92세이다.  마르코스 정권 몰락 이후 30년 만에 필리핀에 새롭게 등장한 '스트롱맨'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통령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모시면서 자신이 신봉하던 선배 독재자를 각별히 대접했다. 겉으로는 정치적인 중립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르코스 왕조의 완전 부활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한때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이던 자신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44)를 대통령 후보 대신 마르코스 주니어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출마 시켰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아버지는 1965년 마르코스 내각에서 행정비서관을 지낸 정치적 동지이다. 필리핀 대선은 전통적으로 지역 엘리트 간의 연합이라는 지역 구도가 중요한 요소이다. 이번 선거에서 북부 루손을 대표하는 마르코스 가문과  남부 민다나오의 비사야를 대표하는 두테르테 가문의 강력한 연대는 마르코스 주니어의 압도적 지지율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역할과 영향력이 큰 것이 분명하지만 서방 주요 언론들은 과거 아버지가 집권했던 시기를 필리핀 역사에서 '황금 시대'라고 세뇌시키는 마르코스 주니어의 소셜미디어 켐페인 전략을 더욱 주목하고 있다. 그는 대선 후보들 중에서 가장 앞선 소셜 인플루언서다. 그는 틱톡에 120만명이 넘는 폴로어를 보유하고 있고, 유튜브 구독자만 200만명이 넘는다. 페이스북 폴로어는 무려 530만명이다. 그의 열렬한 키보드 전사들(keyboard warriors)은 각종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과거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프로파간다 또는  거짓정보를 마구 쏟아내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점성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이미 오래전 '봉봉' 마르코스의 대통령 당선을 예상했다거나 그가 집권하면 유산으로 물려받은 엄청난 규모의 황금을 국민들에게 재분배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내용 등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마르코스 주니어의 지지자 중 다수는 소셜미디어에 열광하는 20~30대 젊은 유권자다. 이들은 마르코스 시니어가 사망하기 이전에 태어난 세대로 그의 악명 높은 폭압 정치나 인권 침해, 부패를 듣도 보도 못한 유권자들이다.   

워싱턴 포스트(WP)는 필리핀 인구의 99%가 온라인 유저(user)로 이 중 절반 이상은 가짜 뉴스에 대한 필터링 능력이 없다고 보도했다. 무분별하게 마구 편집된 거짓 정보가 대량 유포되고 있지만 당국의 규제는 너무 허술하다. 최근 필리핀의 가톨릭 교회도 거짓된 정보로 역사의 진실을 지우려는 시도에 대해 놀라움과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아무튼 '피플 파워'에 밀려 고국에서 추방 당했던  마르코스 가문의 화려한 부활이 눈앞에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도 자신의 '키보드 아미' (keyboard army)를 대거 동원한 온라인 증오 캠페인(hate campaign) 덕분에 지난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대통령이 취임 이후에도 엄청난 희생자를 초래한 마약과의 전쟁이나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무기화 했다. 집권 후 초법적 인권탄압 논란에도 불구하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정치에 일찌감치 입문했다. 1981년 23세 나이에 아버지의 고향인 필리핀 북부 일로코스주(州)의 부지사가 됐다. 1991년 하와이에서 돌아와 정계에 복귀한 그는 2010년 상원의원이 된 뒤 2016년 부통령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동안 아버지의 인권 침해와 약탈적 통치 행위에 대한 사과는 한 차례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필리핀에 부(富)와 영광을 가져다준 위대한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에 의해 악의적이고 부당한 평가를 받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다른 후보들과의 소셜미디어의 '정보전' (information battle)에서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마르코스 독재시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작성한 미국의 역사학자 알프레드 맥코이는 "마치 죽은 마르코스 시니어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며 봉봉 마르크스를  '아버지 대리인'(surrogate for his father)이라 칭했다. 


(미니박스)

'스트롱맨 시대'의 개막 

20년 넘게 장기 집권한 마르코스 정권의 몰락 이후 필리핀은 대통령 6년 단임제로 개헌을 했다. 지난 36년간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이던 고(故)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과  현 두테르테 대통령을 포함 6명의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었다.  마르코스 정권이 출발할 때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나라와 소득수준이 비슷했으나 지금은 비교가 안된다. 민주정부 체제에서 새로 선출된 대통령들은 낙후된 필리핀 경제의 산업화와 현대화를 위해 나름대로 힘을 썼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가난과 극심한 빈부격차라는 고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물류나 입지적으로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제조업 생산기지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지방의 대지주 가문들이 영주처럼 행세하는 봉건적 사회구조는 부의 양극화 해결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필리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6년 전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과 함께 필리핀에서 '스트롱맨 정치' 시대가 열린 배경이다. 36년 전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고 부패한 정권으로 지탄받던 마르코스 왕조가 압도적 지지로 부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르코스 주니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다른 대권 후보들은 뒤늦게 마르코스 시대 경제난과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역공세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이번 선거 구도를 독재와 민주화 세력 간의 정면 대결이라 부를 수가 없다. 과거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권력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려 하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 간의 싸움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 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페이지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