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위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혼돈과 격랑이 함께한 시기였다.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많은 나라는 자멸하거나 외부 침략으로 무너졌다. 유라시아 서쪽과 동쪽 끝에 위치한 제정 러시아와 조선도 그랬다. 두 나라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연유로 멸망했다. 제정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1917년 10월)으로 자멸했고, 조선은 한일병합(1910년 8월)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두 나라 모두 근저에는 무능한 황실, 부패한 관료가 있었다. 여기에 라스푸틴과 진령군(眞靈君)이라는 요승과 무속인이 영향을 미쳤다. 둘 다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황실을 등에 업고 출세가도에 올라 국정을 농단했다.

물론 두 나라 멸망 원인을 이들 책임으로만 돌리는 건 과장됐다. 제정 러시아와 조선은 오랜 동안 무능력과 부패가 누적된 탓에 흙담에 물 스미듯 무너졌다. 라스푸틴과 진령군은 여기에 지푸라기 하나를 더했을 뿐이다. 망국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공통점이 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 시스템 부재다. 또 망가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독버섯이 핀다. 요승과 무속인으로 대표되는 비정상적 행태가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과 오방색으로 무너졌다. 20대 대선을 40여일 남겨놓은 우리사회는 또 다시 스님과 법사, 도사 논란에 휩싸였다. 연일 불거지는 무속논란은 선거판이 굿판으로 전락했다는 당혹감은 안긴다.

헤겔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되풀이 된다는 뜻이다. 최순실 이후 재연된 무속논란에서 헤겔이 남긴 교훈을 실감한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부인 김건희씨는 무속신앙 논란 한가운데 있다. 왕(王)자에서 시작된 석연치 않은 해명은 천공스님과 건진법사, 무정스님으로 이어지면서 ‘이건 뭔가’하는 의구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AI와 5G, 가상화폐, 극초음속 미사일이 오가는 시대에 무속 논란은 뜬금없고 시대착오적이다. 만일 무속신앙에 의존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앞서 언급했던 진령군은 민비와 함께 조선 망국에 일조했다. 민비 신임을 얻은 진령군은 온갖 국정농단을 일삼았다. 민비는 무당에게 왕실 종친에게 내리는 진령군(眞靈君) 군호(君號)를 줬다. 진령군은 궁에 제단을 차리고 굿판을 벌였다. 푸닥거리가 늘어날 때마다 국고는 말라갔다. 진령군은 세자(순조) 병을 낫게 한다며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쌀 한 섬, 비단 한 필, 돈 한 냥을 바치도록 했다는 믿기 힘든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매관매직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왕실은 구식 군대 급료를 주지 않아 임오군란을 자초했다. 군인들 월급조차 미뤘던 조선 왕실이지만 굿판에는 아낌없는 돈을 쓰며 국고를 탕진했다.

사실 고종의 비 민자영에게 명성황후라는 명칭은 과분하다. 황후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남긴 허상에 불과하다. 그는 고종과 함께 무당을 끼고 조선을 망가뜨렸다. 고종은 무능했고 국제 정세에도 어두운 암군이었다. 민자영 또한 영민하며 일제에 맞선 강단 있는 황후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싸움에서 이긴 뒤 왕실과 주요 보직을 민씨 척족으로 채웠다. 이후 민씨 일가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가렴주구와 패악을 일삼으며 조선 500년 몰락을 부채질했다. 민비를 명성황후로 부르는 건 정신승리에 가깝다. 일제에 의해 살해됐기에 일본은 악, 민비는 선이라는 구도에서 만들어진 틀이다.

명성황후라는 스토리텔링 뒤에 숨은 현실은 씁쓸하다. 우리에게 종두법으로 익숙한 지석영이 올린 상소는 이를 반증한다. 지석영은 1894년 7월, 고종에게 목숨을 걸고 상소했다. “신이 억만 백성을 대신해 아룁니다. 정사를 전횡하고 신령을 빙자해 임금을 현혹하고 기도를 구실로 재물을 축내고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무당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그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극악한 행위가 큰 데도 문책하지 않고 비호하니 백성들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지석영이 상소문에서 탄핵한 인물은 민영휘와 진령군이다. 민영휘는 부정부패, 무당 ‘진령군’은 국정을 농단한 주범이었다.

진령군은 자격을 갖추지 않고 적법한 통로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제정 러시아를 말아먹은 라스푸틴도 비슷한 행로를 걸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최순실은 라스푸틴, 진령군과 비교됐다. 국민들은 최순실이 인사와 이권, 국정운영에 관여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런데 비선실세와 무속 논란이 20대 대선 한복판에서 재연됐으니 아이러니하다. 대부분 인간은 절대자나 신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속신앙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올해 초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점에서 주는 토정비결을 보며 한 해 운세를 가늠해 봤다. 많은 한국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양한 토착신앙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재미로 보는 토정비결과 달리 무속인에게 기대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한다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도읍지와 궁궐터를 정하고 조상 묫자리를 잡는 조선시대도 아닌 마당에 무속신앙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김건희씨는 7시간 45분 녹취록에서 도사들과 자주 어울린다고 언급했다. 그래서인지 윤석열 후보와 김건희씨 주변은 유독 법사와 도사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왕(王)자 논란 당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겼던 언론도 이제는 심각성을 인지한 모양이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선대위 캠프에까지 무속인이 활동했다는 정황마저 보도됐다. 만일 윤석열 후보와 김건희씨가 무속신앙에 빠졌다면 개인사로 그칠 일은 아니다.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대통령과 영부인 신분이다. 인간은 자신이 구축한 정신세계 안에서 판단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 영빈관을 옮기는 문제까지 ‘도사의 말’이나 ‘영적인 끼’에 의존하려는 윤 후보 부부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CBS가 의뢰한 서던포스트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 60% 이상은 윤 후보 부부의 무속인과 관계를 부정적으로 봤다. 대부분 국민은 무속이 국정 운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다는 방증이다. 국민들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명확한 해명은 필요해 보인다. 아마 국민들은 속마음은 당장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학교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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