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종전선언' 망상 떨치면 비로소 남북해법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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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1-12-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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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통합형 대북정책을 모색할 때다

[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남북문제가 아직은 대선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그동안 대북정책이 좌우(左右)를 가르는 한 척도로서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의외다. 투표일까지 80여일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 드문 기회에 남북관계를 잠시나마 차분하고 정직하게 톺아봤으면 한다. 갈등과 대립이 아닌 화합과 통합의 대북정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주 쉽게 얘기해보자. 대북정책을 놓고 한쪽에선 ‘대화’를 외치고, 다른 한쪽에선 ‘안보’를 강조한다. 전자, 곧 대화파(자주파)는 “대화를 반대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라고 을러대고, 후자인 안보파(동맹파)는 “북핵 앞에서 대화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반발한다. 양측 간 이런 대립은 분단 이후 있어왔지만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집권(1998년 2월∽2003년 2월)과 함께 내건 ‘햇볕정책’(sunshine policy)으로 인해 심화됐다.
 
햇볕정책은 ‘길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라는 이솝우화의 상징성에 착안한 대표적인 대북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다. 북한을 감싸 안아서 공존·화해·협력토록 하자는 거다. 그런데 역대 어떤 정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이런 정책을 썼다. 생각해보라. 누군들 북한과 시종 대결만 하려고 했겠는가. 경우에 따라선 대화도 하고, 대결도 했던 것이다. 정권의 유, 무능을 떠나 그 길밖에는 없었던 게다.
 
햇볕정책과 이홍구의 ‘상황의 이중성’
 
DJ는 다만 ‘햇볕정책’이란 기발한 이름 짓기(naming)를 통해 대북정책의 목표를 명료화(goal articulation) 하고, 관련된 정책수단을 총동원(mobilization) 함으로써 햇볕정책을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 바람에 대북담론의 균형추가 좌(左)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그렇다고 평생 남북문제에 천착해온 그의 혜안과 집념,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2000년)과 노벨평화상의 의의까지 부정되는 건 아니다.
 
이에 덧붙여 나는 DJ가 대북정책의 골간으로서 ‘상황의 이중성’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적 인식과 자세를 그의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로 추가하고 싶다.
 
‘상황의 이중성’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1994∽1995년)다. 그는 노태우, 김영삼(YS) 정권에서 통일원 장관(1988∽1990, 1994년)을 지냈는데 노 정권 때인 1988년 이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북은 같은 민족이기에 화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대결의 대상이므로 한편으로는 대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하게 느껴지겠지만 이 말이 남북관계에 관한 모든 담론의 귀결점이다.
 
‘대화’와 ‘안보’ 사이를 부단히 오가야
 
우리는 불행히도 이런 이중적 상황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대화와 대결(안보) 사이를 부단히 오갈 수밖에 없다. 이를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이 DJ였다. 그는 ‘대화’에 대해 얘기하려면 반드시 안보와 한미동맹의 중요성부터 강조했다. DJ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박지원 국정원장도 과거 기자들에게 누차 이를 확인해줬다. “DJ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누구든 오직 ‘대화’만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안보’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특히 진보 좌파들이 입만 열면 떠드는 ‘대화론’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오도된 대화지상주의가 남북관계를 얼마나 왜곡하는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안보’ 쪽도 마찬가지다. ‘안보’만 강조해서 남북관계에 조금이라도 진전의 틈새를 만들 수 있을까. 없다. 오히려 “북의 도발 분위기만 고조시키는 호전(好戰)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뭐, 대화에 반대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와 같은 겁박이 그래서 나왔다. YS 정권 이후 역대 보수 정권들은 좌파들의 이 한마디에 맥을 못 췄다.
 
이게 우리가 놓여있는 본질적인 구조다. 누구도 이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 1924∽2013년)의 표현을 빌리면 신(新)현실주의, 또는 구조적 현실주의(structural realism)의 한복판에 우리는 놓여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한국적 현실주의’의 요체라고 본다.
 
대북정책 놓고 싸울 이유 없어
 
그렇다면 해법은 자명하다. 좌든, 우든 겸허하게 구조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대화’와 ‘안보’ 사이를 열심히 오가야 한다. 그러면서 소위 제도주의적 이상(理想)이라 할 공존과 협력, 공생과 공영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게 대북정책에 관한 한 우리의 기본 입장이자 철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온 나라가 대북정책을 놓고 편이 갈린 채 피 터지게 싸울 이유도 없는 것이다. (졸저 <사회통합형 대북정책>, 2013년 나남 참고)

물론 필자의 주장에 대해 “체제이론의 한계인 보수적 현상유지(status quo)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런 당신은 현상을 깰 힘이 있는가? 구조를 바꿀 의지와 이를 결행할 슬기롭고 역량 있는 지도자가 있으며,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돼 있는가. 그것도 길지 않은 시간에 말이다.
 
지난 7일 이재명, 윤석열 두 후보 측의 외교안보 참모인 위성락(전 주러시아 대사)과 김성한(전 외교부 차관)이 최종현 학술원 주최로 열린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TPD) 화상회의에 나란히 참석했다. 위 전 대사는 예의 스냅백(snapback · 선 제재 완화, 위반 시 다시 제재)에 기초한 단계적 해법을 제시했다. 반면, 김 전 차관은 “북핵문제에 진정한 진전을 이룰 때까지 제재를 유지하고, 단계적 접근을 하더라도 1단계에서부터 어려운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제안은 모두 아직 구체성이 없어 평가하기는 이르다.
 
 
 
DJ의 대북정책 높이 평가한 尹
 
다만, 위 전 대사의 스냅백은 문정인 전 대통령 외교안보특보의 지론과 같은 것으로, 북의 제재를 한번 풀고 나면 다시 제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김 전 차관의 “1단계부터 어려운 조치를 취하자”는 방식은, 북측과의 대화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든 북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9일에는 이, 윤 두 후보(이하 李, 尹)가 직접 나섰다.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21주년 기념식(김대중 도서관)에서다. 李는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고, 尹은 DJ의 국민통합의 정신을 기렸다. 李는 尹에게 “종전선언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가야 한다”면서 “종전선언에 대한 전향적 재검토를 요청한다”고 했다.
 
尹은 대응하지 않은 채 “김 전 대통령은 정치 보복도 않고 모든 정적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성인(聖人) 정치인으로 국민통합을 이룩했다”고 했다. 한반도 평화의 열쇠를 한미동맹과 한·미·일 공조 강화에서 찾기도 했다. DJ의 대북정책을 국민의힘 후보인 尹이 높이 평가하고, 李는 상대적으로 오히려 DJ의 대북정책과 조금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었다(DJ는 종전선언을 추진한 적이 없다).

李, “종전선언 반대는 반역행위”
 
李는 11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종전선언을 거론했다. “대한민국 정치인이 일본의 종전선언 반대에 동조하면 친일 넘어 반역행위"라고까지 했다. 이 또한 DJ의 대일관(對日觀)이나 태도와 맞지 않는다(DJ는 재임 중 ‘친일’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李는 종전선언을 주장했지만 종전선언으로 초래될 수도 있는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 국민이 걱정하는 문제에 대해선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안보 정책은 싸울 필요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지만 역시 ‘어떻게’(how)는 빠져있다. 尹은 가능한 한 말을 아끼는 듯했다. ‘스냅백’ 같은 정책은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히나,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자. 대북정책은 구조적으로 상황의 이중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종전선언 같은 불붙은 막대기를 들고 인화성 물질로 가득 찬 동네를 아이들처럼 휘젓고 다닐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종전선언’을 북을 대화의 테이블로 불러내기 위한 마중물로 쓴다고? 글쎄다. 북이 이미 이쪽 속내를 간파해버렸고, 중국과 함께 오히려 우리를 엮어낼 미끼로 쓰려는 판인데 먹히기나 하겠는가.
 
좌, 보수정권의 기여도 인정해야
 
남북관계는 무슨 선언을 남기겠다든지, 관계개선의 금자탑을 쌓겠다든지, 하는 정치적 망상(妄想)만 털어내면 누구에게나 다 보인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도 ‘대화’와 ‘대결’(안보)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야 하고 오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기회의 창은 열린다. 李든, 尹이든 이를 알고 정직하게 받아들이기만 해도 대북정책을 둘러싼 헛된 싸움을 피할 수 있다.
 
아울러 좌파도 보수우파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 좌파만이 남북문제 해결에 앞장선 게 아니다. 우파도 열심히 했고 성과도 컸다.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선언과 산업화, 노태우의 북방외교,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선언, YS의 북핵 동결과 하나회 척결 등이 있었기에 DJ는 안심하고 김정일을 만나러 평양에 갈 수 있었다. 독선과 편견, 오만과 기망(欺罔)의 그늘에서 벗어나면 남북관계가 보인다. 싸울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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