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 톺아보기] 치열했던 대선…‘결판’ 냈던 시대정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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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기자
입력 2021-12-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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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9 대선이 90여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야 대선주자들은 이렇다 할 대선 어젠다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이나 고발사주 등 후보와 관련된 네거티브성 이슈만 제기되고 있을 뿐 국가의 미래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의제가 없다.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을 뽑는 절차이기도 하지만, 향후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전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래서 되겠나”란 한숨이 여야 정치권 내부에서도 나온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선거 결과를 결판 지었던 시대정신을 톺아봤다.
 
◆‘나라다운 나라’ 내건 文…탄핵 대선 여유 있게 승리
 

[사진=청와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19대 대선은 전대미문의 대통령 탄핵 이후 치러진 선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비선실세’인 최순실씨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여러 대기업들이 최씨에게 접근하기 위해 금전적 이득을 제공한 정황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최씨의 딸 정유라씨를 위해 승마용 말 세 마리를 제공했다.
 
특정인의 경제적·사회적 이득을 위해 정치 권력이 봉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19대 대선의 시대정신은 ‘국가 정상화’, ‘정의’, ‘공정’ 등이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앞세운 문 후보의 선거 전략에 범야권은 이렇다 할 대응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다. 문 후보(41.08%)는 2위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24.03%)와 15% 넘는 격차로 여유 있게 승리를 거뒀다.
 
◆ 朴 ‘경제 민주화’로 과감한 중도 확장…호남 끌어안기
 

[사진=대통령기록관] 

2012년 18대 대선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양 진영이 결집해 치러진 선거였다. ‘중도층’을 누가 선점하느냐가 중요한 이슈였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진보의 전유물로 여겨진 ‘분배’ 이슈를 선점, 중도층 소구를 위해 ‘경제 민주화’를 꺼내들었다. 박 후보는 ‘경제 민주화’ 조항을 헌법에 넣은 김종인 박사를 경선캠프 공동선대위원장에 영입한 데 이어, 본선에선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겼다.
 
박 후보는 이외에도 기초연금을 공약으로 내걸고, 김대중 전 대통령 측근인 한광옥·한화갑·김경재 등 동교동 가신을 영입했다. 박 후보는 보수정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호남에서 10%를 넘기는 득표율로 간신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박 후보는 51.55%, 문 후보는 48.02%. 3.53%포인트 차 간발의 승부였다.
 
◆‘성공한 CEO’ MB, ‘7·4·7 공약’으로 ‘성장 로망’ 자극
 

[사진=대통령기록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겨뤘던 2007년 17대 대선은 역대 가장 싱거웠던 선거로 꼽힌다. 이 후보가 48.67%의 득표로 26.14%에 그친 정 후보를 여유 있게 앞섰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겨뤘던 한나라당 경선이 ‘본선’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한나라당의 승리가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대정신은 ‘성장’ 그리고 ‘재개발·재건축’이었다. 이 후보가 내세운 목표 ‘7·4·7’이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747’은 국내 경제성장률을 7%로 높이고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며 세계 7위권의 선진대국을 만든다는 것이다. 보잉 747 여객기가 날아오르는 이미지를 차용했다. ‘747’은 선거 슬로건이었을 뿐 실현이 어려운 목표였다. 그럼에도 현대건설 사장 출신의 ‘성공한 최고경영자(CEO)’ 이명박 후보가 내건 ‘747’은 국민의 욕망을 자극해 여유 있는 승리를 안겼다. 한나라당은 여세를 몰아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언더독의 신화’ 盧, 정몽준 단일화 철회로 지지층 ‘결집’
 

[사진=대통령기록관]

2002년 16대 대선은 역대 가장 드라마틱한 선거로 꼽힌다. ‘언더독’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간발의 차이로 꺾고 승리를 거둔 것. 노 후보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언더독의 스토리’, 그리고 단일화였다. 민주당 비주류였던 노 후보는 경선에서부터 주류 세력의 텃세에 시달렸다. 광주에서의 기적적인 역전극으로 민주당의 후보가 됐지만, 이후에도 정몽준 무소속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 압박 등에 시달렸다. 핍박받는 언더독의 분투를 보며 ‘노사모’라는 자생적 조직이 생겼고,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서도 승리했다.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온라인상의 정치 운동이 노 후보에게 큰 힘이 됐다.
 
상대는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출신인 이회창 후보였다. 이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절치부심,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며 지지율에서도 줄곧 우위를 보였다. 노 후보를 당선시켜준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투표 개시를 7시간여 앞둔 상황에서 터져 나온 정몽준 후보의 지지 철회 선언이다. 온라인을 통해 정 후보의 지지 철회 선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오히려 노 후보의 지지층이 강하게 결집했다. 노 후보는 48.91%, 이 후보는 46.58%. 2.33%포인트 차이 박빙 승부였다.
 
◆ DJP 연대로 ‘국민 통합’…與 분열도 ‘한몫’
 

[사진=대통령기록관]

1997년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승리는 전략과 명분이 잘 조화된 결과다. 당시만 해도 대선은 보수정권에 뚜렷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로, PK(부산·울산·경남)와 TK(대구·경북), 충청 등은 보수 정당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PK와 TK의 인구적 우세를 바탕으로 한 보수 정당의 선거 공학이 먹히던 시기였다.
 
DJ는 먼저 충청을 기반으로 한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전략적 제휴를 시도했다. JP에게 국무총리 자리를 내주고 내각 임명권도 일부 주기로 했다. 이른바 DJP연합이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섰던 DJ가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JP와 손잡는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명분은 ‘국민통합’이었다. DJ는 집권 이후에도 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을 지양하며 국민통합을 추구했다. DJ의 승리엔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분열도 한몫했다. 한나라당 경선 결과에 불복,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가 나서면서 여권의 표가 분산됐다. DJ는 40.27%, 이회창 후보는 38.74%, 이인제 후보는 19.20%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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