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시샘]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마스크철학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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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10-2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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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국의 '마스크와 보낸 한 철'



살다 살다 그깟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 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 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 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들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철 보내고 나니까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이상국의 '마스크와 보낸 한 철'


 

[2020년 3월17일 뉴질랜드의 웰링턴, 마스크를 낀 소녀. 웰링턴=신화연합뉴스]



빈섬과 동명(同名)인, 이 뛰어난 시인의, 서글서글한 시들은 득도의 경지같이 부럽다. 세상에 널린 풍경과 거리에 널린 말들을 몇 가닥 척척 걸쳐놓으니, 내가 일년 내내 머리 싸매고 썼던 칼럼이 머쓱하게 나가 떨어지는 것 같다. 사람을 빙긋이 웃게 하는 공명(共鳴)에다가 명심보감의 심플한 몇 줄로 깨달음을 각(刻)해 놓으니, 아침 출근길마다 외워야 할 마스크경(經)이 되었다. 종심소욕불유구인가. 무슨 말이든 이 시안(詩眼)을 통과하면, 내 '숨'처럼 편안해진다.

마스크는 '나'를 가리고 '밖'을 가린다. 나를 가리니, 내가 뱉는 말이나 내가 내놓는 표정에 조심성이 조금 더해진다. 밖을 가리니, 세상의 많은 일들을 신중하게 보게 되고 함부로 하지 않게 되는 마음이 생긴다. 마스크는 그저 입 앞을 가려 바이러스를 차단하고자 하는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그 가림이 분별(分別)을 높이는 뜻밖의 스승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내가 조금 더 철이 들고 나라도 조금 더 철이 드는 것 같은 기분도, 거기에서 오는 것이리라.

시(詩) 또한 인간의 말과 글에 씌우는 마스크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시 마스크 안에서 쉬는 숨은, 익숙해서 무뎌진 일상의 감염에서 감수성과 생각을 지켜주는 것인지 모른다. 이상국 시인은, 고품격의 최고급 마스크 장수다. 

                                                  이상국 논설실장(이빈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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