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스토리 사이, 정말 그 신문 오보는, 노벨상을 낳은 대반전이었나
노벨 탄생의 달에 선정, 타계의 날에 시상

10월은 그해의 노벨상 수상자가 선정되는 달이고 12월 10일은 시상식과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이 10월 21일에 태어났으니, 그 시기와 묘하게 맞춘 듯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탄생’이 이뤄지는 셈이다.

또 그가 노벨상 유언을 남기고 돌아간 12월 10일 시상의 세리머니가 진행되니, 노벨상은 해마다 죽은 노벨이 부활하여 인류 중의 뛰어난 공헌자에게 최상의 영광을 건네는 듯한 이벤트를 방불케 한다.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이 상(賞)보다 역사적인 권위를 지니는 영예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노벨'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름이다.
 

알프레드 노벨


죽음의 장사꾼이 어제 죽었다

노벨상의 계절이 되면, 흔히 인용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노벨이 1888년 4월 13일 프랑스의 어느 신문에서 잘못 보도된 자신의 사망 기사를 읽고, 노벨상 창설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다.

그 기사는 ‘Le Marchand de la mort est mort(죽음의 장사꾼이 죽었다)’라는 헤드라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사 리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내서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이 어제 사망했다”라는 문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날(4월 12일)은 칸에 있던 그의 형인 루드비히 노벨(Ludvig Nobel)이 죽은 날이었다. 사실이라면 신문의 심각한 오보였다. 노벨은 파리에서 이 기사를 읽고난 뒤, 겉으로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성공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그 부음기사를 통해 읽게 된 것이다. 수많은 발명을 통해 인류에게 기여한 발명가도 아니고, 성공적인 기업가도 아니었다. 오로지,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무기를 개발하여 스스로의 이익만 탐한 ‘끔찍한 악의 화신’일 뿐이었다. ‘죽음의 장사꾼’은 바로 그런 비판을 압축한 촌철살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노벨은, 자신의 삶에 씌워진 오명(汚名)을 그가 결과적으로 이룬 ‘부(富)’로 씻어내고자 고민을 한다. 그 창조적인 머리에서 번쩍 떠오른 것이, 인류의 삶과 지혜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킨 공로자에게 큰 상을 주는 것이었다.

이 스토리는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서, 의심할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날짜까지 적시된 그날의 부음 오보 기사가 실린 신문은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볼 수 있는 일간지(기사에 ‘어제’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일 발간한 신문으로 보인다)의 그 날짜를 확인해보면 될 내용인데도 프랑스의 언론들은 물론 노벨위원회조차도 많은 이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오보 스토리가 노벨상의 탄생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 위해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있을까.

성공했다는 자여, 사후평판을 생각해보라

해외의 한 온라인 매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문 오보 사건은 노벨 자선활동의 원동력으로 자주 인용되지만, 역사가들은 아직 ‘죽음의 장사꾼’ 사망 기사의 원본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 이야기를 ‘역사’가 아닌 ‘신화’로 받아들이거나 노벨의 결정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노벨재단은, 노벨이 1868년에 ‘인류의 실용적 삶에 중요한 발명품’으로 스웨덴 왕립과학원으로부터 상을 받았을 때, 노벨상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굳이 그 부음기사 때문이 아니라, 발명상(賞)을 받으면서 자신도 누군가를 상으로 치하하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실천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도 확인되지 않은 개연성일 뿐이다.

부음 스토리가 인상적이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까닭은, ’사후(死後)의 평판‘에 대한 생각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이상 죽음을 맞는다. 그것을 어긴 인간은 역사상 아무도 없다. 의식하든 않든 자신의 육체적 삶이 소멸한 이후에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는 자신에 대해 애착을 지닌다. 나는 한 마디로 어떤 사람인가. 그 질문 앞에 서보게 된다. 살아생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을, 죽은 뒤에 남은 사람들이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스스로가 전혀 교정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그 ’냉혹한 평가‘가 두려워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노벨은 운이 좋게도, 한 신문의 실수로 살아생전에 ’죽은 뒤의 평판‘을 당겨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죽음의 장사꾼. 사람을 빨리 죽이는 무기를 발명해서 스스로의 이익만 취한 인간. 그 평판은 자신의 삶 전체를 무의미할 만큼의 단호하고 퉁명스런 악평(惡評)이었다. 시인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노벨에게 자신의 생에서 이보다 더한 비극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어느 프랑스 신문의 오보‘에서 비롯됐다는 전제가 ’참‘으로 성립되어야 하기에, 이 삶의 통찰과 교훈은 현실과 가상 사이를 떠도는 것일 수밖에 없다. ’오보‘가 사실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굳이 이 불완전한 에피소드를 기둥 삼아서 노벨이 위대한 상을 만드는 ’계기‘로 의지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까지 드러난 팩트들로만 고려해도 노벨이 그런 깨달음에 이른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노벨이 어느 프랑스 신문에서 형 루드비히의 정상적인 부음을 보았다 해도, 노벨가(家)나 자신에게 향한 '무기(武器) 장사'에 대한 비난을 읽었을 수도 있다. 
 

푸틴 [사진=연합뉴스]


2008년 푸틴이 '형님 노벨상'을 받았다?

2008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루드비히 노벨상‘을 수상한다. 이 상은 1888년 루드비히가 사망한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셰비키 혁명으로 폐기되었다가 2004년 러시아의 사업가와 예술가가 다시 부활시킨 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러시아에서 만든 상이다. 푸틴이 이 상을 받은 이유가, ’러시아에 대한 8년간의 봉헌‘이라고 하니 상 자체가 얄궂고 급조된 느낌이 든다. 이번에 푸틴에 맞선 러시아 언론인 무라토프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상황을 보면, 오히려 아이로니컬하다. 노벨의 형 루드비히의 이름을 걸었지만 그 상이 노벨상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러시아는 왜 이상한 노벨상을 만들었을까.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인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1837년에 1859년까지 22년간 러시아에서 살았다. 건축가이자 발명가였던 임마누엘은 큰 화재와 잇따른 사업 실패로 가족을 둔 채 홀로 고국 스웨덴을 떠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한다. 알프레도가 4살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임마누엘은 발명품으로 황제 니콜라스 1세의 신임을 얻었고 군수품 공장을 차려 돈을 벌었다. 5년 뒤인 1842년 가족들도 러시아로 이주한다.

크림전쟁의 수훈갑, 노벨 집안

9살이 된 알프레드는 그때부터 가정교사를 두고 정규교육을 받는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는 프랑스 유학 1년, 미국 유학 4년을 제외하고 13년간 러시아에서 살았다. 특히 크림전쟁(영국-프랑스-프로이센 등 연합군과 러시아가 싸운 전쟁)은 노벨가의 지뢰와 수뢰(水雷)가 큰 전공(戰功)을 세운 전쟁이었다. 이 나라에서 노벨을 러시아인처럼 생각하는 까닭은 이런 점에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8남매 중에 셋째 아들이었다. 첫째는 로베르트였고 둘째는 루드비히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어린 세 아들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가장 재능이 뛰어난 아이는 루드비히(1831~1888)입니다. 가장 부지런한 녀석은 셋째 알프레드(1833~1896)이고, 첫째(로베르트, 1829~1896)는 모험 정신이 뛰어나죠.“ 셋을 비교하는 아버지의 시선에는, 예리한 관찰이 숨어 있을 것이다. 모험심 강하고 재능 있는 로베르토와 루드비히는 유전개발로 산업의 흐름을 바꿔놓았고, 끈기 있는 알프레드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세계를 바꿔놓는다.

승승장구하던 노벨가에게 전쟁 종료는 오히려 날벼락이었다. 크림전쟁 이후 러시아가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노벨가는 큰 타격을 받아 파산한다. 1865년 그들은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노벨상 [자료=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 제공]


여동생과 직원 4명을 잃은 폭발참사

이곳에서 알프레드는 아버지를 도와 폭약 개발에 몰입한다. 그들이 고국에 오기 전인 1847년 이탈리아의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1812~1888)는 나이트로글리세린이란 무색투명한 기름 상태의 물질을 합성해냈다. 이 물질은 폭발할 경우 원래 부피의 1200배 늘어난 기체로 바뀌고 5000도씨 이상의 온도 상승이 이뤄진다. 약간의 충격에도 폭발하기 때문에 위험한 물질이었다. 1864년 9월 3일 이들은 공장에서 이 물질을 실험하던 중에 큰 폭발사고를 낸다. 이 사고로 막내동생 에밀과 공장의 조수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생이 죽은 뒤 아버지 임마누엘은 뇌졸중으로 병상에 눕는다.

알프레드 노벨은 어느 날 실험대 위의 시약이 숯가루에 쏟아진 뒤 빠르게 스며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액체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뒷산에는 규조토가 많았다. 규조토는 백악기시대 바다돌말의 퇴적물이었다. 수백 나노미터의 공기방울로 이뤄진 이 흙은 숯가루의 2배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빨아들였다.

1867년 이 고체 나이트로글리세린을 ’다이너마이트‘라는 상표로 판매한다. 이 화약은 당시 수에즈운하 건설과 알프스산맥 터널 등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기업인 ’노벨 다이너마이트 트르스터사‘가 창립된다. 한편 로베르트와 루드비히는 바쿠(아제르바이잔) 유전개발에 성공해 정유소를 건설하고, 1877년 세계 첫 유조선을 띄워 세계 첫 파이프라인을 개설하는 등 또다른 성공가도를 달렸다.

유전 대박낸 루드비히를 신문이 몰랐을까

승승장구하던 둘째 형 루드비히가 죽은 것은 그 잘나가던 날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부호 가문이었던 노벨가의 삼총사 중에서 한 명이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다. 이 부음 기사가 1단으로 처리되었을 수는 있지만, 세계 첫 파이프라인을 개설한 루드비히와 다이나마이트로 세상을 놀라게 한 알프레드를 혼동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아무리 프랑스 신문이라도 그게 헷갈릴 만한 사안이었을까.

기사를 제대로 썼다면, 바쿠 유전개발로 대박을 낸 루드비히가 사망했다고 밝히고, 그가 바로 다이너마이트 기업의 알프레드의 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다이너마이트 기업주를 표현하면서 ’죽음의 장사꾼‘이란 표현을 썼을 가능성은 있다. 크림전쟁 때 어뢰와 지뢰를 만든 집안이었다는 사실과 동생이 폭약 생산업자라는 점이 맞물리면서 노벨가 전체를 향한 매도였을 수도 있다.

이 언론에 이런 표현의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다 해도, 알프레드의 ’깊은 자의식‘을 건드리는 상황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뒤, 공식석상에서 이 무기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가공할 폭발력과 치명적 피해 때문에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지금 핵무기가 전쟁을 막는다고 옹호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인간이 이성이 있는 이상, 자기의 죽음까지 초래하는 공멸(共滅)을 선택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이 작동하는 범위 너머의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상대가 물러설 것을 믿으면서 한계를 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노벨은 핵무장론자들이 그런 것처럼, 이런 점을 애써 무시하려 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다이너마이트는 1000개의 세계적인 조약보다 더 빨리 평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순간에 모든 군대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 그들은 반드시 황금빛 평화를 지킬 것입니다.“
 

스웨덴 극작가 스트린드베리


노벨을 '죽음의 장사꾼'이라 말한 스트린드베리

그런데 동생의 사망을 즈음하여 불편한 잡음이 들려왔고, 내가 죽은 뒤에 어떤 존재로 호명되고 인식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양심을 치명적으로 건드린 사람은 스웨덴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스트린드베리((John August Strindberg.1849∼1912)였을 수 있다. 입센과 함께 북유럽의 최고 문호로 꼽히는 그는, 노벨을 직격탄으로 겨냥해 ’죽음의 장사꾼‘으로 호칭한 사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벨이 유언서에 자국의 최고작가인 스트린드베리를 후보에서 제외해달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예리한 관찰과 신랄한 필치로 당시 사회의 관성과 둔감을 꾸짖었던 그는, 노벨가의 성공이 지닌 어마어마한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성취가 누군가의 참혹한 죽음을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일갈한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은 그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의 말에 찍혀 올라온 자기의 삶의 진상이 새삼 끔찍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지금은 저토록 거침없는 혀 위에서만 저런 얘기가 나오지만, 내가 죽고나면 많은 이들이 거침없이 저런 평가를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불안이 엄습했을까.

나는 죽음의 장사꾼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해 355개의 발명 특허를 냈다! 나는 화학자이며 발명가이며, 공학자이며 기업가이다! 스웨덴 과학한림원 회원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항변은 그 생애의 견적을 내는 눈길 앞에서 이렇게 쏟아지고 있었다.

메멘토 모리가 남긴 위대한 유산

노벨은 여러 차례 유언장을 남겼다. 죽기 1년 전인 1895년 11월 27일 62세의 노벨은 파리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에서 마지막 유언장에 서명을 했다. 서명 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및 평화 분야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사람들을 위한 상을 만드는데 자신의 재산을 사용한다.“ 노벨은 자신의 총 자산 중에서 94%(2008년 기준 약 1억8600만 달러)로 5개의 노벨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노벨상이란 무엇인가. 물론 노벨의 뜻만이 곧 노벨상의 뜻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죽음을 팔아서 성공한 장사꾼‘이란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 노벨상을 만든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죽음 앞에서, ’죽음‘보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인류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이란 기준은 바로, 한 인간이 눈감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전쟁과 고난의 시대를 지나 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을 것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진실과 선(善)과 아름다움을 기려야 할 인간의 책무를 영원한 유지(遺志)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 뒤의 노벨을 생각한 그 ’메멘토 모리‘의 정신이 인류의 한 등대가 된 것이다. 그는 죽음의 장사꾼이 아니라 ’살림의 참일꾼‘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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