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빛고을의 진정한 魂 오방 최흥종(下)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입력 : 2021-04-23 06:00
'총독부 시위' 나환자들 앞에 오방이 있었다

[1922년 처음 시베리아로 파송되기 전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 교인들과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는 최흥종 목사]


나환자의 피고름이 묻은 지팡이를 집어서 건네준 이 사건(1909년)을 계기로 오방은 평생을 나환자들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는다. 윌슨 선교사가 운영하는 광주 제중원이 한센인들을 돌봐주고 치료까지 해준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윌슨의 조수로 이들을 돌보던 오방은 수용시설이 부족함을 절감하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광주 효천면 봉선리의 땅 1천평을 선뜻 내놓는다. 이 땅에 이 지역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이 세워진다(1912년). 수용인원은 600명. 오방은 그해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의 장로가 되고, 1915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3년간 수학한다(졸업은 1921년).

차종순은 ‘나환자의 지팡이’ 사건 이후, 오방이 스스로 자신이 죽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사망통지서를 발송한 1935년까지를 오방 일생의 ‘중간기’로 본다. 이 기간에 오방은 ‘가족’에서 나환자공동체로 건너왔으며, 다시 나환자공동체에서 광주 시민사회로 건너왔다는 것이다(차종순 「오방 최흥종과 무등산」, 광주문화재단 『무등, 시대의 스승을 품다』 2019년에서 재인용). 오방은 이 시기에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1914년), 광주YMCA(1920년), 광주노동공제회(1923년), 광주나병구제회(1924년), 신간회 광주지회(1927년), 빈민구제활동을 위한 계유구락부(1933년) 등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한다.

3‧1 만세운동으로 1년4개월 獄苦

당시만 해도 동토(凍土)의 땅이었던 시베리아에 1922년, 1927년 두 차례나 자원해 선교사로 다녀오기도 한다. 그는 왜 시베리아로 갔을까. 유랑민이 되어 떠도는 동포들에 대한 연민과 선교 열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참여욕구 때문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시베리아에 갔을 때는 3개월 만에 민족운동 혐의로 소련 당국에 의해 검거돼 추방당하기도 한다.

오방은 이미 1919년 3·1운동 때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서울 파고다공원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이 일로 체포돼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1년 4개월 복역한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오방은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맡아 여러 사회단체, 민족단체 사람들과 함께 활동한다. 그때마다 화합을 강조했다. 국권 회복을 성취하기 위해 “방법론적인 이념투쟁을 떠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설득하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박종열 「목회자로서의 오방의 생애와 사상」 , 『화광동진의 삶』 2000년)

한센병자들과 걸어서 日 총독부까지

1929년 오방은 신간회 지회장을 사임하고 다시 나환자 곁으로 돌아온다. 전국적인 나환자 시설이 절실했던 오방은 상경해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1932년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를 만든다. 일제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자 1932년 광주에서 나환자 150명과 함께 서울 총독부까지 행진을 시작한다. 저 유명한 ‘구라(救癩) 대행진’이다. 이들은 꼬박 11일을 걸었다. 전국 각지에서 나환자들이 합류해 총독부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400여명에 달했다. 이에 놀란 우가키(于垣) 총독은 소록도 나환자시설 확충과 갱생 지원을 약속해야 했다.



1935년 오방은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주변 사람들에게 돌린다. 내용은 이렇다. “1937년 3월 17일 이후 나 오방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로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말아주시오. 나는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오방의 이런 행동은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순응한 제도권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발과, 신앙인으로서 자신은 세속의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각오에서 나왔다.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去勢하다

오방은 사망통지서를 돌리기 전에 거세(정관수술)까지 했다.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한 건 이때부터다. 당시 오방의 심정은 1937년 2월 발표한 글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에 담겨있다. “평신도만 깨고 보면 현재 교계에 등장한 양의랑심(羊依狼心)적 가(假)목자들이 절로 무대를 잃고 퇴장할 것이며…교회가 성화될 것이요.…지금은 자다가 마땅히 깰 때입니다. 평신도 제현이여.” 평신도들이 각성해야 양의 탈을 쓴 가짜 목사들이 퇴출 될 거라는 얘기였다. 이 무렵 오방은 집을 나와서 손수레(리어카) 위에 판자를 세워 만든 ‘손수레 집’에서 살았다. 낮에는 나환자와 걸인들의 곁을 지키고 밤이면 손수레 안에서 잤다.

1945년, 해방. 오방은 잠시 광주 시민사회로 다시 나오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면서 좌, 우익 모두로부터 전남(광주) 건준위원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된 것이다. 정치에 뜻이 없었던 그는 한달 만에 사임한다. 1948년 10월 백범 김구 선생이 광주에 왔다. 선생은 오방에게 함께 일하자고 간곡히 청했으나 오방은 사양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나환자와 결핵환자, 걸인들을 보살피고, 청년과 여성을 교육시키는 데 있었다. 오방은 ‘한국나예방협회’를 만들고, 광주YMCA를 재건한다. 청소년들에게 농업기술교육을 시키는 삼애학원(1949년), 나주의 음성나환자 정착촌 호혜원(1955년),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등원(1958년)과 무등원(1962년)을 설립한다. 오방은 1966년 2월 단식에 들어가 100여일 만인 5월 14일 소천한다.
 
 

[무등산 원효사 쪽 흙담집에서 만난 최흥종(가운데 앉아있는 이)과 함석헌(뒷줄 오른쪽에서 여섯째)]

 
“함께 정치하자”는 金九의 청을 사양

우리는 오방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오방이 생전에 아들처럼 아꼈다는 고 이영생 전 광주 YMCA 총무(1992년 타계)는 198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동해(東海) 물입니다. 지금 나는 그것을(오방을) 말로 표현하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무어라 표현해도 그분을 다 얘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 우리 취재팀의 심정이 꼭 그랬다. 선생에 대해 우리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2000년 오방 기념사업회가 각계 인사들로부터 추모 기고를 받아 오방을 기리는 문집, 『화광동진의 삶』을 펴냈다. 거기에는 고 리영희 교수도 참여했다. 그는 오방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해방 이후,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영달, 출세를 거부한다. 노자의 도교에서 불교의 선까지 모든 것을 수렴해서 완전한 성숙한 삶, 노자의 무위의 삶, 예수의 삶, 부처님의 삶과 같았다. 대체로 성 프란치스코와 슈바이처와 간디와 톨스토이,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와 닮은 실천하는 삶이다.”(『화광동진의 삶』) 가가와 도요히코(かがわとよひこ‧1888∼1960년)는 ‘20세기의 성자’ ‘빈민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의 목사, 사회운동가다. 시인 신경림(동국대 석좌교수)은 이 문집에서 오방이 영적(靈的) 부가가치를 창출했으며, 우리들에게 그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감과 에너지를 주었다고 말했다.

오방 기념관의 최영관 관장(전남대 명예교수)은 취재팀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을 광주에 모셔서 특강을 듣곤 했는데 함석헌 선생님은 꼭 무등산으로 오방을 뵈러 갔다. 그때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절 받으세요.’라며 오방에게 큰절을 올렸다.” 최 관장은 오방을 “참으로 광주가 낳은 위대한 기독교적 선지자였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민족의 큰 족적을 남기신 지도자”라고 했다. 그런 오방이지만 기독교 내부에선 반드시 긍정적인 시선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각에선 그를 기인, 또는 이단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오방이 그의 무게에 비해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차종순은 “일제 치하에서 현실과 타협했던 목사들, 예컨대 신사참배를 하고, 심지어는 일제에 무기까지 헌납했던 목사들이 해방이 되어서도 교권을 잡고 득세한 데 대해 오방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런 오방을 목사들은 경계하고, 경원시했다”는 것이다.

오방선생이 있어 福받은 광주시민

이 과정에서 초기에 호의적이었던 외국인 선교사들마저 일제의 정치 배제 논리에 순응해 오방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차종순은 “오방이 지향했던 것은 결국 ‘사회적 복음주의’였다”면서 “선교사들이 서구식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달했다면 오방은 이를 한국식 예수님, 즉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복음적 예수로 재해석해서 우리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신학자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는 2016년 10월 오방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오방의 일생을 관통한 하나의 사상(신념)을 ‘생명존중’으로 보았다. “생명존중의 핵심은 예수의 아가페적 사랑(love as agape)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불완전한 타자가 인격적으로 자기성취와 자기실현을 이루도록 돕는 사랑이다. 나병환자들과 오방 자신의 생명은 분리돼 있지 않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 생명일체감의 사랑이다. 오방은 아가페적 사랑의 실재성(實在性)을 경험했고 믿었다.”

오방은 생전에 ‘애적 전융성’(愛的轉融性)이란 제목의 한시(漢詩)를 통해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자기의 손해를 돌보지 않는 사랑이요/남을 사랑하여 새로운 삶을 이루도록 하는 사랑이요/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용서하는 사랑이요/다함이 없이 새롭고 새롭게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김 교수는 오방의 생명존중의 신앙과 삶이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의존하며 함께 존재함을 깨달아야하고, ‘신앙생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활신앙’이 중요하며, 종교와 교육은 생명의 자기초월적 영원성에 눈을 뜨도록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며, 이를 통해 생명존중을 제1가치로 삼는 제4 인류문명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방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영원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광주에 살면서, 매일 무등산을 올려다보고 오방을 생각하고 그의 생명존중의 사랑에 대해 고뇌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福)이다.


 

 

 
  
이재호 논설고문 ‧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leejaeho64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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