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34]고려의 공수처, 어사대의 막강한 권능과 눈부신 활약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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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20-1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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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사대 수장의 직위는 장·차관급, 실제 권력은 총리급

  • ‘코리아제국’과 ‘코리아공화국’의 평행이론? 어사대 활약 10선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 참된 선비의 학문은 치국안민과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부국강병, 백성이 문무에 능하도록 교육하는 일 등이 두루 해당된다. 어찌 고문 구절을 모방하거나 양반의관을 입고서 예절만을 익히는 것이겠는가? - 다산 정약용

2020년 12월 10일 공수처법 개정안 통과는 125년간 단절됐던 한민족 법제의 맥을 잇고 진정한 대한민국 법치시대를 연 민족사적 쾌거다. 삼국시대 이후 공수처가 없는 시기는 1895년~2019년뿐, 신라(사정부), 발해(중정대), 고려(어사대), 조선(의금부)엔 모두 공수처가 존재했다.

필자가 그동안 공수처에 관해 주로 횡적(지리,타국)비교연구 고찰했다면, 이제부터는 종적(역사,본국)분석탐구 성찰하겠다.

우선 고려시대 공수처격 어사대 지위와 권한 조직, 역할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고려사』 하나만 참조문헌으로 사용하겠다. 방대하면서도 정확하기로 세계가 공인하고 있는 한국사 최고의 명품 브랜드 『고려사』 (대외국호 고려공화국 대한민국에서만 지방유형문화재로 처박아 두고 있음)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 어사대 수장의 직위는 장·차관급, 실제 권력은 총리급

고려시대 공수처격 어사대의 위상 권한 조직과 그 변화는 『고려사』 제70권 지(志) 30을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어사대(御史臺), 개국 초에는 사헌대(司憲臺)라 불렸다가, 성종 14년(995)에 어사대로 고쳤으며, 시정을 논집하고 관료의 기풍을 교정하며 관료를 규찰(수사·감찰)과 탄핵(기소· 소추)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대부(大夫)·중승(中丞)·시어사(侍御史)·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감찰어사가 있었다.

현종 5년(1014)에 어사대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였으며, 사(使)·부사(副使)·녹사(錄事)를 두었으나, 모두 상임 인원은 없었다. 현종 6년(1015)에 금오대를 폐지하고, 사헌대로 고쳤으나 현종 14년(1023)에 다시 어사대로 고쳤다. 정종 11년(1045)에 권지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를 올려 반차(2인자)를 합문지후위에 두게했다.

문종때 어사대의 관제를 정했는데, 판사(判事) 1인과 대부 1인의 관품은 정3품(현재 차관급)이며, 지사(知事) 1인과 중승 1인은 종4품(중앙부처 국장급)이며, 잡단 1인과 시어사 2인은 모두 종5품(현재 4급공무원격)이며, 전중시어사 2인은 정6품(현재 5급공무원격)이며, 감찰어사 10인은 종6품(현재 6급공무원격)이었다.

예종 11년(1116)에 조서를 내려, 지사와 잡단을 본품의 항두(行頭 최고등급)로 서게 하였다. 신종 5년(1202)에 어사 2인을 승격시켜 참질(叅秩)로 삼았다.

충렬왕 34년(1308)에 다시 사헌부로 고쳤는데, 대부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고치고 관품을 정2품(현재의 장관급)으로 올렸다. 중승은 집의(執義)라 하고 관품을 정3품으로 올렸으며, 시어사는 장령이라고 하고 종4품으로 올렸다. 그리고 전중시어사는 지평이라 하고 정5품으로 올렸다. 감찰어사는 규정(糾正)이라 하고, 14인으로 증원하면서 그 중 4인을 겸직하게 했으며, 관품은 그전대로 종6품으로 했다.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어사대로 고쳤으며, 대부는 예전대로 했고, 집의를 고쳐 중승이라 하고 1인을 감원하였다. 장령은 시어사라 하고, 지평은 전중시어사라 하면서 종5품으로 내렸으며, 규정은 감찰어사라 하였다

2. ‘코리아제국’과 ‘코리아공화국’의 평행이론? 어사대 활약 10선

창녀를 처로 삼은 사법고관을 탄핵하다.
민폐를 끼친 군부대를 해산하다.
공민왕이 어사대의 판단을 따랐더라면 고려는 망하지 않았을 수도


『고려사』에는 어사대의 구체적 활약상을 기록한 사건이 261회나 나온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10건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코리아 제국(918~1392년)이 코리아 공화국(1948년~ )이 마치 평행이론처럼 느껴지는 건 무엇일까?

1)1043년 10월 18일, 절도죄를 저지른 조성도감사(造成都監使)에 왕이 가벼운 형벌을 내리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어사대(御史臺)에서 논박하기를, “율(律)에 의거하여 판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윤허했다.

2)1101년 10월 5일 어사대, 민폐를 끼친 군부대를 해산하다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에서 도적을 잡는 군사가 함부로 민호(民戶)를 노략질하여 해가 도리어 심하니 그들을 해산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했다.

3) 1103년 9월 16일 어사대에 명하여 역모죄를 저지른 자들을 체포하여 남쪽 끝으로 유배 보냈다.

4)1104년 6월 16일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영원병마녹사(寧遠兵馬錄事) 우여유(禹汝維)가 변방의 백성을 침탈하고 어지럽게 하며 뇌물을 거두어들였으니에 정위에 붙여서(기소하여) 논죄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했다.

5) 1118년(예종 13년) 4월 14일
어사대 관리가 3일간 업무를 보지 않았다. 이에 앞서 내시급사(內侍給使)가 어사대 서리를 구타하고 모욕했는데, 어사대 관리가 물어서 밝히지 않았다. 또 태자부(太子府)의 내수(內竪)가 금령을 어기고 흰 비단으로 지은 버선과 바지, 검은 비단으로 지은 적삼과 검은 서대를 착용했다. 어사대 서리가 그것을 벗기려다가 도리어 구금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사대의 서리 서염(徐琰) 등이 어사대 관리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신분이 비록 낮지만 모두 법을 맡은 관청의 서리인데, 지금 내시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어사대의 기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철저히 논하여 공도(公道)를 바로 잡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어사대의 고관은 우물쭈물하며 따르지 않았다. 서염 등 15인이 화를 내고 스스로 물러나는 바람에 남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6) 『고려사』 17권 1143년(인종21년)9월 20일(음) 계유(癸酉)
창녀를 처로 삼은 배경성(裵景誠)은 어사대의 탄핵으로 승선에서 물러난 뒤 지어사대사에 제수되었으나, 관리의 정사청탁(正邪淸濁)을 규정 기풍을 바로잡는 풍헌직을 맡는 일은 더욱 마땅한 바가 아니라는 감찰어사등 대간들의 반대로 지리부사로 전보됐다.

7) 1151년 예종 5년 미상(음)
어사대가 환관 정함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다

8) 1192년 11월 8일 이의민(고려무신 정권의 수장)이 어사대부(御史大夫) 왕도(王度)가 수덕궁 옆에 집을 지은 것을 구실삼아 파면시켰기에 조정과 민간이 모두 실망했다.

9) 1268년 2월 25일(음) 어사대는 장군 주선이 숙부의 처와 간통하여 참형당하게끔 했다.

10) 1361년 2월 15일(음) 공민왕은 어사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자춘을 동북면병마사로 삼다. 우리 환조(桓祖: 이성계의 부)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로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자 어사대에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자춘(李子春)은 동북면 사람이고 또 그 지역의 천호(千戶)이니 그를 병마사로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어사대의 상소를 묵살하고 잔치를 베풀어 동북면으로 가는 것을 위로하였고 재추들도 또한 회빈문에서 전송하였으며 그가 부임길에 오르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제수했다

어사대의 판단은 정확했다. 공민왕이 이성계의 부 이자춘을 동북면 병마사로 파견한 처사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만일 공민왕이 어사대의 상소를 받아드렸더라면 고려제국은 그리 쉽게 망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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