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바이든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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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서정대학교 교수(전 YTN대표이사) 사장)
입력 2020-11-2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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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교수] 



패자 트럼프의 몽니 속에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위한 시곗바늘이 힘겹게 움직이고 있다. 내년 1월 20일 바이든이 취임하면, 확연하게 달라질 것은 정치의 정상화일 것이다. 트럼프 식의 ‘좌충우돌 정치’는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된다. 상식과 합리, 품위의 정치가 복귀하면서 ‘G1’ 미국의 리더십이 안정감을 되찾을 전망이다.

바이든이 펼쳐나갈 경제 정책은 큰 줄기가 이미 잡혀 있는 상태다. 당장은 낙제점을 받아온 팬데믹 극복과 경제 회생에 올인하는 게 불가피할 것이다. 이게 가닥이 잡히면 양극화 해소와 형평성 제고에 초점을 맞춘 바이드노믹스에 본격 시동이 걸릴 전망이다. 바이든은 대선 과정에서 대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를 예고했다. 대신 중산층 가정에는 세 부담 완화를 약속했다.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바이든이 시도할 구조적 변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개혁이다. 그는 팬데믹 속에서도 트럼프가 증시에만 신경을 쓴다고 비판했다. 자신은 근로자와 중산층 가족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공언했다. 더 나아가 기업이 주주에게만 책임을 지는 주주자본주의를 끝낼 때가 됐다며, 기업은 근로자·지역사회·국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할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 얘기는 바이든의 입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새 행정부에서 주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이 사안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모습이다. 상대적으로 더 진보 성향인 워런은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Accountable Capitalism Act)’ 제정을 제안하고 있다. 워런은 이 법에 대한 제안 설명에서 "미국의 대기업들은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경영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진보 진영이니까 반기업적인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면, 이는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의 방향 선회는 미국 재계가 먼저 깃발을 들었다는 데 있다. 미국에는 우리나라의 전경련이나 상의같이 재계를 대표하는 기관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있다. 이 단체는 1997년 이래 정기적으로 ‘기업지배구조 원칙’을 발표해왔다. 늘 핵심 내용은 '기업은 주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주주우선주의였다. 이런 기조가 지난해에 급선회했다. BRT는 지난해 8월 이례적으로 주주우선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며, 기업의 목적은 고객·근로자·거래기업·지역사회·주주 등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봉사하는 것임을 선언했다. 여기에 중대한 변화가 포함돼 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기업이 중시해야 할 이해관계자 중 주주의 순위가 맨 앞에서 맨 뒤로 밀렸다는 점이다. 대신 고객을 맨 선두에, 그리고 근로자를 둘째로 세웠다. 또 단기가 아닌 장기적 가치를 추구할 것을 기업들에 주문했다. 이 같은 내용의 ‘2019년 기업지배구조 원칙’에는 애플의 팀 쿡과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등 내로라하는 미국 CEO 181명이 서명했다. 이 성명을 주도한 BRT 회장인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이번 원칙은 모든 미국인에게 봉사하는 경제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기업의 확고한 다짐을 반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20여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기본 틀이 돼온 주주자본주의에 대해 CEO들이 종지부를 찍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주창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결국 보수와 진보, 진영을 가리지 않고 자본주의의 혁신을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재계가 이렇게 자본주의를 수술대에 올리자며 선수를 치고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외부 환경의 변화를 선제적으로 수용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는 시위는 주주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돼온 신자유주의에 대한 미국민의 반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실제로 갤럽의 조사 결과를 보면, 대기업을 ‘매우 또는 상당히 신뢰한다’는 응답 비율은 1997년의 28%에서 2020년에는 19%로 크게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도 월가 중심의 주주우선주의가 빈부 격차를 심화시켜온 요인이라고 보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개편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미국 재계로선 이런 움직임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지 않고 큰 흐름으로 가시화될 것으로 보이자 솔선해서 변화를 주도하자는 선택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논의는 글로벌 무대에서도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다보스 선언의 주제로 정했다. 슈밥 회장은 그동안의 주주자본주의가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법인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직임을 잊었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이 시스템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선언을 통해 기업이 공정한 몫의 세금을 부담하고, 부패에 대해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하며, 글로벌 공급 체인에서 인권을 존중할 것 등을 촉구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별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해외와 달리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주주에 대한 기업이익의 편중된 배분 문제가 미국만큼 이슈가 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그 선두에 섰다. 최태원 회장은 한 강연 자리에서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공감 능력이 없었다고 자성하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기업의 미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인으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방법을 고민하겠다는 게 최 회장의 생각이다. 이런 철학을 가진 최 회장이 현 정부 들어 재계의 대표성이 강해진 대한상의 회장에 오를 경우 국내에서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논의가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부분적 현상이긴 하지만 일부 국내외 기업들은 이미 이 방향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SK그룹은 올해 초 경영 철학이 담긴 ‘SKMS(SK 경영시스템)’를 개정하면서 그 안에 'SK의 각 회사는 이해관계자가 중시하는 가치를 파악하고, 사회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해야 한다'는 원칙을 포함시켰다. 2018년에 ‘기업 시민’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선언한 포스코는 모든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더 큰 기업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최근 모든 금융 계열사가 ‘탈(脫) 석탄’을 선언하고 석탄 발전과 관련한 추가 투자를 완전히 중단하기로 했다. 특히 최근 회계학계에서는 주주 중심의 재무제표를 개혁해 경제적·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이해관계자 중심의 통합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논의가 더 빨랐던 해외에서는 기업의 움직임이 더 활발한 편이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 경영의 핵심 요소인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의 가치가 기업 경영에서 중시되고 있다. 이 기준을 충족시킨 기업에 대한 ESG 투자가 급속하게 늘어나 현재 잔액이 45조 달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적극적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대표적 인사다. 핑크 회장은 모든 이해관계자에 대한 봉사가 기업 경영의 중심축이어야 한다며, 이런 가치에 어긋나는 기업에 대해서는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하고 있다. 또 세계적 해운사인 머스크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속에서 의료용품 등의 긴급 수송이 필요해지자 새로운 노선을 개설해 선박을 투입하는 등 빠른 대응을 해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코로나19 역학 추적을 위해 의료 기관과 밀접하게 협조한 마이크로소프트나 교사들에게 ‘구글 교실(Google Classroom)’을 포함한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제공한 알파벳도 사회가 어려울 때 공감 경영을 한 점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물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기관투자가 협회의 반박이 대표적이다. 기업 경영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홍보용 선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미국 재계와 세계경제포럼의 선언에 이어 이를 지지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고 많은 기업이 호응하고 있는 만큼 자본주의 개혁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떠올라 추진력이 생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무엇보다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반영한 기업 경영을 어떻게 측정하고 평가하고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전망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의 이익이 고객, 근로자, 거래업체, 지역사회 등과 함께 공유되는 ‘낙수효과’를 복원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공간을 넓혀주는 규제 완화도 팬데믹의 극복을 위해 긴요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은 경기 회생을 위한 마중물 역할에 그치는 만큼 위기 돌파를 위한 근본적인 힘은 기업의 투자 활성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는 시카고학파의 태두인 밀턴 프리드먼이 이른바 ‘프리드먼 독트린’을 발표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프리드먼은 1970년 9월 13일자 뉴욕 타임스에 게재한 글에서 기업의 책임은 주인인 주주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 독트린은 이후 기업의 목적은 물론 주주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본 철학이 돼왔다. 50년이 지난 지금, 사회는 기업에 이를 지양하고 상생과 공감의 경영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의 대전환에 시동이 걸리고 있다. 방역과 경제 운용에서 선두권에 서 온 한국 경제도 한국적 자본주의의 새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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