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구리시 '13도 창의군·김규식 선생' 역사 재조명 활발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구리)임봉재 기자
입력 2020-11-19 11:08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구한말 3대 의병 중 대규모 부대…구리 수택동 서울진공작전 집결지'

  • '구리 출신 김규식 선생, 사령장 맡아 카이로선언 쟁취 역할'

1908년 의병연합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사진=구리시 제공]


경기 구리시(시장 안승남)가 구한말 3대 의병 중 마지막으로 활동한 '13도 창의군'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13도 창의군'은 구한말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의병을 모아 1907년 12월 현재 구리 수택동에서 결성됐고, 수택동은 서울진공작전의 집겹지였다.

시는 '13도 창의군'과 유적지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지원 등에 필요한 '13도 창의군 기념사업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또 추진위원회를 구성, 아차산성과 조선왕릉, 구한말 의병활동을 아우르는 기념사업 추진 동력을 확보하고자 학술대회를 여는 활동을 펼쳤다.

구리 출신이자 '13도 창의군'의 사령장이었던 노은 김규식 선생의 유해 봉환 등 기념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13도 창의군 기념사업 학술대회.[사진=구리시 제공]


▲'13도 창의군' 평가 재조명

지난달 열린 학술대회에서 '13도 창의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13도 창의군'은 구한말 3대 의병 중 마지막으로 활동한 대규모 부대로 알려져 왔다.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3도 창의군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해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지금 구리에서 조직된 전국 의병 부대였다"고 평가했다. '13도 창의군'은 최대 의병 조직이었지만, 당시 후속부대 지원 불발 등의 이유로 일본군과의 교전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그 의미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13대 창의군'은 1907년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르는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으로 역사적 의미에서 그 여파는 컸다고 평가되고 있다. 2년 후 양주와 포천, 고양 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지방에서 왜인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이른바 '해방구'가 됐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몰락의 서막이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구한말 의병.[사진=구리시 제공]


▲이인영 총대장, 국내 학계 역사적 평가도 조명돼야

당시 총대장은 무명의 문벌유생이었던 이인영이 맡았다. 군사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당대 손을 꼽을 정도의 전략가였지만, 국내 학계에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인물로 알려져 왔다. 1907년 9월 이은찬, 이구재 등은 해산된 군대에서 흩어진 80여명을 포함해 500여명의 병력을 모집한 후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을 제안했다. 이인영은 이를 받아들여 13도 창의군의 긴 도정을 시작한다. 이후 관동창의대장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군사를 모으는 한편 김세영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의병부대가 애국단체이니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달라'는 호소문을 보낸다. 동시에 해외동포들에게도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단결해 우리 조국을 위해 몸 바쳐 독립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잔인한 일본인들의 악행과 횡포를 전 세계에 호소해야만 한다'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원주를 거점으로 무장활동을 벌이면서도 전국 각도에 일제가 통치하는 서울을 탈환하자는 것을 호소, 의병들을 구리 수택동으로 집결시켰다. 그해 의병 1만명 규모의 부대를 24개 진으로 하는 '13도 창의대진소'로 재편성한다.

노은 김규식 선생 추모제.[사진=구리시 제공]


▲구리 출신 노은 김규식 선생 사령장으로 참여…'카이로선언' 쟁취

'13도 창의군'에서 주목되는 인물 중 또 다른 한 명은 사령장을 맡았던 노은 김규식 선생이다. 선생은 훗날 대한독립군단 총사령이 된다. 당시 맡은 역할은 공작원을 도성 안으로 침투시켜 정보 보고를 하도록 돕는 일이다. 전 시위대 병사 윤수정을 도성 안으로 들여보내 전 시위대 부위 백낙정에게 알리게 해 도성 안에서 13도 창의군의 서울 공격 시 바로 내응케 했다. 지난달 열린 학술대회에서 일부 발제자들은 '카이로선언'은 미군의 진주 덕택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리의 '원수 13도 창의대진'의 국민군을 계승해 전개한 독립투쟁과 이 투쟁으로 쟁취한 최초의 국제문서라고 주장했다. 즉, 구리의 13도 창의군으로부터 시작해 만주의 대한독립군으로 이어지고, 김구와 윤봉길 의사로, 중격 광복군으로 연결된 항일 국민전쟁의 크나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항일 국민전쟁은 고려시대 37년 항목전쟁 보다 오래 지속됐다. 삼별초 항목전쟁은 패배로 끝난 반면, 구리 13도 창의대진은 카이로선언을 통해 대한민국의 승리와 일제의 패배로 귀결됐다.

안승남 구리시장.[사진=구리시 제공]


▲13도 창의군 기념사업, 김규식 선생 유해 봉환…기념사업 추진

시는 무심코 지나쳤던 잊혀진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본격화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윤호중 국회의 주도로 13도 창의군에 대한 첫 논의가 시작됐다. 이어 안승남 시장이 기념사업을 제안, 사업 추진에 물꼬를 텄다. 이후 창립발기인이 구성, 사업에 시동을 걸었지만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시 중단됐다. 그러나 지난 4월 사업이 재개돼 창립총회를 통해 추진위원회 100명이 구성되는 등 사업이 재개했다. 추진위는 13도 창의군 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시는 향후 13도 창의군 집결지의 역사적 의미를 담은 표지판을 설치하고, 학술발표회·강연회·전시회 등 학술사업을 지원할 예정이다. 정신을 계승하는 각종 기념사업도 추진위와 협의해 추진키로 했다. 특히 근·현대사 인물 재조명 시책의 일환으로 사령장으로 활동했던 김규식 선생 기념사업도 추진 예정이다. 이미 매년 김규식 선생 생가터 앞에서 추모식을 진행해 오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끝나면 중국에 쓸쓸히 잠들어 있는 선생의 배우자 등 가족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동구릉 가족 묘역에 안치할 계획이다. 안 시장은 "근·현대사 과정에서 선조들이 역경을 딛고, 피 흘렸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할 것"이마려 아차산성, 조선왕릉, 이제 13도 창의군 집결지까지 모든 과정을 후손들에게 전파하고, 기록해 '시민행복 특별시' 구리시가 훌륭한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