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5)] 이런 것이 큰손! …날 위해 왜 쓰나, 남 위해 왜 아끼나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10-19 09:37
류영모의 '하느님 경제론'…사람 사이 계산하는 건, 운명을 캄캄하게 할뿐

[다석 류영모와 김효정 부부.]

류영모와 이상웅의 인연

1935년 류영모가 북한산 비봉 아래 구기리로 이사 올 때, 거기에 있던 낡은 집을 수리해야 했다. 근처 구드랑골에 살고 있던 이상웅(1913~1988)이란 청년에게 일을 맡겼다.

기와를 손질하는데 이상웅이 아래에서 진흙을 던져주는 일을 했다. 그 진흙을 받아 기와에 붙이던 일꾼이 얼굴로 갑자기 진흙덩이 하나를 이상웅에게 도로 던졌다. 아래에서 흙을 똑바로 던져주지 않아 일 하기가 어렵다며 기와일꾼이 성질을 낸 것이다. 난데없이 진흙세례를 맞은 스물두살의 이상웅. 버럭 화를 내며 그를 향해 큰 흙덩이를 던지며 욕을 퍼붓는다. 곧 싸움이 날 판이다. 그때 류영모가 나서서 청년을 말렸다. 이상웅은 아직 분을 삭이지 못했으면서도, 류영모의 말에 금방 누그러졌다.

이상웅의 고향은 안성이었고 18세에 서울로 와서 막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과일과 꽃을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고, 닥치는 대로 품팔이도 했다. 체격은 크지 않았지만 완력과 담력이 있어서 다부진 인상이었다. 말도 잘 붙이고 서글서글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마음에 여린 구석이 있었다. 그는 류영모를 잘 따랐고 이것저것 힘 닿는 대로 도와주려 했다. 이런 태도가 기특하여 류영모는 일을 할 때마다 품삯을 더 쳐주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과일을 팔 때, 그곳을 드나드는 폭력조직의 황씨 성을 가진 두목에게 번번이 돈을 뜯겼다. 어느 날 이상웅은 그 두목에게 죽기살기로 덤벼들어 그를 때려눕혔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던 일제 암흑기의 풍경이다. 이 일이 있은 뒤 류영모는 이상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상웅이, 어떻게 그런 자를 이겼는가. 담력이 놀랍네. 이름에 웅(雄)자가 있는 이유를 알겠구먼." 그런 뜻밖의 칭찬에 이상웅은 머리 뒤를 긁적였다.

천안 광덕 보산원리의 땅을 맡기니

류영모가 천안 광덕의 보산원리에 농토를 샀을 때, 이상웅을 그곳 관리인으로 삼았다. 류영모는 믿음직한 그를 불러 "개천골에 가서 농사하며 살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상웅은 "선생님이 하라면 당연히 가서 해야지요"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광덕에 내려간 이상웅은 농사일에 열심이었지만, 농한기엔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도박을 했다. 노름으로 잃은 돈이 적지 않았다. 이 일을 알고 류영모는 그를 불러 다른 것을 묻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노름이란 것도 한번 해보았으면 되었네. 이제 그만하도록 해요." 그런데 놀랍게도 류영모의 부드러운 말에, 이상웅은 다시는 도박 자리에 끼지 않았다.

그는 서울 막일판에서 술을 배웠고 음주를 몹시 좋아했다. 어느 날 류영모는 이 습관에 대해서도 슬쩍 말했다. "자네는 술도 먹을 만큼 먹어보지 않았던가. 이제 그만 끊어요." 이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미 술은 중독인지라 끊을 수가 없었다. 단주(斷酒)를 결심했으나 번번이 실패였다. 이상웅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막노동을 하느라 술을 마셨고 말씨도 거칠어졌다. 류선생님이 나를 아껴 술을 끊으라 하시는데,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몹시 괴롭다. 내 인생은 실패했더라도 너희들은 술을 먹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들의 몫까지 마셨다고 생각해라." 아들들은 모두 금주를 실천했다.

류영모는 이상웅이 신앙적으로 발전하기가 쉽지 않고 또 여러 가지 모자라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늘 그를 감싸며 좋은 말을 해주었다. 개천골에서 꾸준히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했다. 이상웅에게 농경지 임대료를 한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상웅은 해마다 산에서 딴 호두와 농사지은 콩으로 쑨 메주를 등에 지고 서울의 류영모 집으로 왔다. 그게 소작료인 셈이었다. 류영모는 고맙게 받았다. 나중에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사람아, 이젠 그만 가져오게. 자네도 나이가 들었으니 가지고 오는 게 힘겨울 것일세. 나도 이젠 이가 없어 호두를 먹지도 못해요."

소작하던 이에게 땅을 내준 류영모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농지를 신고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한동안 이상웅은 이 문제를 미루다가, 1967년 류영모를 찾았다. "선생님. 개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 보니, 먹고 살기 바빴는지 모아둔 돈이 없습니다. 가난하여 자식들도 제대로 학교 공부를 못 시켰습니다. 저희가 살아가려면 농지가 꼭 필요한데....이 땅을 예전에 사실 때의 값으로 제게 소유권을 넘겨주시면 어떨지요." 그러니까 23년전 일제 말기에 샀던 값으로 농토를 달라는 얘기였다. 류영모는 이상웅의 말을 듣더니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개천골 농토는 20년 이상 농사지은 사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좋아요. 소원대로 해요."

그때 류영모의 부인 김효정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아니 내 아들 자상(柳自相)이도 땅이 없어 강원도 평창에 가서 화전민 땅을 사서 감자와 옥수수 농사로 겨우 연명하고 있어요. 어찌 자네는 자기 자식 걱정만을 하는 것이오?" 그러자, 이상웅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농사 지으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던 류영모는 가만히 이상웅의 팔을 잡고 사랑방에 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면서 자리를 옮기게 했다.

"여보게. 이건 나와 자네와의 일인데, 내 가족과 입씨름을 하면 무슨 방도가 나오겠는가. 내가 말한 대로 하게나." 류영모는 농지 소유권을 넘겨준다. 이상웅은 감읍하면서, 농지 3천 평과 대지 6백 평을, 평당 쌀 한 되의 값으로 쳐서 내놓았다. 당시 시세의 반값으로 땅을 건네준 셈이었다. 

류영모의 생애를 살피면서, 이 대목을 읽노라면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당시 그의 생활과 생각을 그대로 만나는 생생한 느낌이 있다. 일상의 소소한 대목에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고, 세상의 이익에 대해 얼마나 대범했는지도 느끼게 한다. 그저 이상에만 치우쳐 공허한 소리만 하는 '철학'이 아니라, 온몸에 배어있는 인(仁)과 온 생각에 배어있는 자비로 사람을 대하고 마음을 내준다. 스스로를 낮추며 기꺼이 손해를 보는 성자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말했다. "사람 사이를 계산하고 따지는 것은 사람의 운명을 캄캄하게 합니다. 사람 사이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류영모의 '하느님 경제'론

"사람의 몸뚱이는 벗어버릴 허물이며 개인의 행복과 영화를 추구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不敬)이며 필요 이상의 재물을 가지는 것은 도둑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류영모였기에, 부(富)의 축적이나 경제적 풍요를 이상화하는 생각에 대해선 단호히 비판적이었다.

스스로 청빈(淸貧)을 체질화하여, 무명한복을 입고 간소한 저녁 한끼만 먹었다. 평생 보약 한첩 먹은 적이 없다. 약국이나 병원에 가는 것도 극히 싫어했다. 육신을 위해 왜 그런 돈을 쓰느냐고 했다. 집은 헌집을 사서 개조해 살았고, 가구라고는 집에서 만든 낮은 책상이 거의 전부였다. 가방은 천으로 만든 것이었고 시계는 혼인예물로 받은 것이었다. 머리는 집에서 깎았으며 날마다 냉수마찰을 하여 목욕탕에 갈 일도 없었다. 남에게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았고 직접 다녔다.

옛사람이 말한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하여 그런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가난에 머물며 하늘을 위해 살아야 하기에 가난을 즐겨 택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추구한 그였기에 오히려 쓰지 않은 돈들이 남들보다 더 크게 모였다. 가난한 이를 돕는 일에서는 누구보다 손이 컸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고 말한 예수의 뜻을 실천한 것이다.

1955년 YMCA 연경반 금요강좌에 나오던 이상호가 은행지점장이 되었을 때, 류영모를 찾아가 이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이 10만원씩 내서 백 사람이 합치면 천만원이 됩니다. 이 목돈을 저축해 놓고 그 돈의 이자로 어려운 이를 도우면 어떨까요?" 류영모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뜻이 참 좋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그 모임 이름은 밑뿌리를 돋운다는 뜻에서 밑돋모임으로 하면 어떨지요?" 그러면서 선뜻 10만원을 내놓았다. 농사 짓는 사람이 바로 내놓기에는 당시로선 몹시 큰돈이었다. 제일은행 은행장(정규항)도 참여를 했는데, 한꺼번에 내지 못하고 세번 분할하여 낼 정도였다. 밑돋모임은 12명이 참여했고, 120만원의 금리로 고학생(苦學生) 장학금과 영세농 농자금, 그리고 영세상인 사업자금을 지원했다. 이 모임은, 당시 돈가치의 하락으로 자금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1973년 7월 23일 안양 관악산 계곡에서 조경묵이 영세농 송아지 사주기 운동(약칭 '주는 운동') 모임을 창립했다. 83세의 류영모는 이 모임에 초청을 받고 나갔는데, 그날 초대회장에 추대됐다. 그때 류영모는 1만원을 내놓으며 평생회비로 해달라고 했다. 4만원이 송아지 한 마리 값이던 시절이었으니, 이 또한 거액이 아닐 수 없었다. 7년 뒤 '주는 운동'의 결산보고를 보면, 농가에 송아지 41마리를 사줬고 많은 농기구를 지원해준 기록이 나온다. 이 모임은 농지 없는 농부에게 땅을 사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어려운 시골 경제를 살리는 데에 주력했다. 

류영모의 경제는 '하느님 경제'다. "자기를 위해서는 항상 궁핍하고 남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원조할 자금을 준비하고 있다." 이 말은 김교신이 밝혔던 삶의 신조인 동시에, 류영모의 평생을 관통하는 경제철학이었다. "남을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을 죽이는 일이요, 나를 이기는 것은 승리요 생명입니다. 본디 하느님께서 내게 찾아준 분량을 영글게 노력하면 반드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몸을 가졌으면 서로 도와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의 경제철학이야말로 '하느님 경제론'이다. 많은 종교단체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이 같은 헌신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봄직하다. 제 배를 불리는 역사(役事)는 '하느님 역사'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유물사관(唯物史觀)은 만족할 만한 물질과 좋은 환경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물건에 만족을 느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하느님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라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석가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참을 찾았습니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유토피아가 온다면 어떻단 말입니까? 거기도 상대세계일 뿐입니다. 상대세계에서 과연 우는 소리가 없겠습니까. 거짓말 잘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이념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일러주신 말씀대로 했다면 서양에 공산주의가 생겼을까요. 성경에 틈이 생겨서 공산주의 같은 사상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같이 먹자는, 공평하게 하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치를 알았다면 이론을 만들어 실천을 했어야 합니다. 좀 더 낫게 해야할 것을 못하는 바람에,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동차 앞에 선 류영모. 그는 거의 자동차를 타지 않았고 평생을 걸어다녔다. 그 세속의 무욕과 청빈의 실천은 그의 영적 지향을 돋운 힘이었다.]



[다석 한시]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瞬息實存虛空心(순식실존허공심)
茶飯現在觀世音(다반현재관세음)
性焰自燒却垢肉(성염자소각구육)
禍種無妄逆福音(화종무망역복음)

            류영모의  '觀太自然界(관태자연계, 태초의 자연계를 보라)'


눈 깜짝하고 숨 한번 쉴 때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빈탕의 마음
차 마시고 밥 먹는 바로 지금이, 세상 소리를 관조하는 하늘의 눈
얼나의 불꽃은 제나를 태워 때묻은 육신을 없애건만
재앙의 씨앗은 '없음(無, 하느님)'을 알지 못하니 신의 뜻을 거스르노라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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