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성자 다석 류영모(53)] 악을 악으로 갚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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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6-2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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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년 정신적 사제(師弟)…류영모의 길,김교신의 길(2)

[다석 류영모]


한국 기독교의 길을 연 두 사람

류영모와 김교신의 길은 사뭇 달랐다. 그러나 김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류영모에 닿기 어렵다. 류영모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김교신의 사상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류영모에게로 가는 길은, 김교신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류영모는 1890년생이고 김교신은 1901년생으로 11년 차이다. 두 사람 모두 유학자 가정에서 자라났다. 류영모는 15세에 교회 기독교에 입문해 오산학교에 신앙을 전파하기까지 했으나 7년 만인 22세 무렵에 교회와 결별한다. 김교신은 20세에 교회에 입문해 세례를 받았으나 두 달 만에 교회내분에 충격을 받고 나와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성서를 배운다. 

두 사람은 20세기 초반 기독교 전래기(傳來期)에 종교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조선 유학자적 시선에 바탕한 주체적 재해석으로 의미심장한 사상의 성취와 실천적 삶을 이뤄낸 탁월한 선각(先覺)이었다. 그들의 추구가, 서구가 이룩해놓은 교회 기독교의 비기독교적인 이탈을 부정하거나 바로잡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둘의 문제의식은 다르지 않았다.

류영모와 김교신의 만남은, 식민지 조선에서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체화(體化)하는 두 가지 사상이 서로 접면하는 순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18년간 각자의 길을 가면서 때로는 하나의 길을 함께 가면서 동고동락을 했다. 그 합류의 기간은, 류영모에게는 37세부터 55세까지였고, 김교신에게는 26세부터 44세까지였다. 류영모는 '강의'와 기고와 신앙을 통해 투철한 사상적 실천과 궁신(窮神)으로 나아갔던 때였고, 김교신 또한 '성서조선'을 통해 신앙을 실천했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의 아름다운 신념을 살아냈던 때이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힘과 영감을 주었던 관계였다.

두 사람을 연결한 함석헌과 우치무라

두 사람이 만나게 하는 연결점에 함석헌이 있다.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류영모는 강의 중에 제자 함석헌에게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얘기를 해준다. 함석헌은 이 일본인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후 일본에 갔을 때 1901년생 동갑나기였던 김교신에게서 우치무라 집회를 소개받게 된다. 이때 그에게 우치무라 얘기를 해준 스승 류영모에 대한 얘기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교신은 1927년 귀국해서 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잡지 성서조선을 내기로 한다. 이때 김교신은 함석헌으로부터 류영모를 소개받는다. 그리고 연구활동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류영모는 김교신의 이 제안에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치무라를 함석헌에게 소개해준 분이, 우치무라의 성서연구 모임과 같은 단체를 조선에 만들자는 제안에 왜 거절을 하실까. 김교신은 의아해 했다.

류영모가 생각한 우치무라는, 사상의 동기에는 공명(共鳴)할 바가 있었으나 분명한 한계가 있어보였다. 우치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기독교와, 신학교육 등에 의해 장식되고 교리화된 기독교를 나눴다. 서구 기독교가 누적해온 상부구조의 '형식'을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류영모가 공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치무라는 서구 기독교를 올라타고 있던 형식(교회와 교리)을 해체한 빈 자리에 국가, 즉 일본을 채워넣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적 기독교가 그의 마음속에 탄생한다.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일본적 기독교'의 혼선

그는 그러나 일본국가가 아닌 일본국의 신인 천황의 문제 앞에서, 내적 충돌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앙과 애국심의 대결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립의 '시험'에서 그는 천황에게 고개 숙이지 못했고 불경한(不敬漢)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 개신교 교계에서도 고립된다. 1892년 그가 "나는 무교회(無敎會)다"라고 선언했던 건 그런 상황 속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소수 중심의 애국적 교회를 만든 셈이었다.

우치무라는 또 다른 갈등에 부딪친다. 국가가 치르는 전쟁은 어떻게 볼 것인가. 기독교와 전쟁은 변증법적인 총합관계를 이룰 수 있는가. 그는 '의전(義戰)'이란 개념을 쓰며 전쟁을 비호하기도 했고 이후 그것을 반성하며 비판하기도 하는 등 논리의 혼란을 겪었다. 나중에 그는 신약성서가 명령하는 것은 절대평화뿐이라며 어떠한 경우에도 무기를 들고 싸워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900년 그는 '성서의 연구'라는 잡지를 발행했고, 1901년에 '무교회'라는 잡지도 냈다. 이 잡지에서 우치무라는 "무교회는 교회를 없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힘에 의한 교회를 거부한다는 의미"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교회의 제도주의와 성례전주의를 거부하고 기독교인은 중개자 없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살아있는 관계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국 조선의 '애국적 신앙' 김교신

김교신은 우치무라에게서 신앙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기독교적 정체성에 근거하여 의미있는 국가상을 제시하려는 이 일본인이야말로 그에게 향후 신앙과 애국을 통합할 의미있는 스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우치무라가 유일무이한 스승이었다고까지 말했다. 물론 김교신과 우치무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치무라의 국가는 신이 통치하는 황제의 나라였고 전쟁을 일으키는 침략의 강국이었다. 그러나 김교신의 나라는 바로 그 우치무라의 국가로부터 침탈을 받은 식민지 국가였고 국가 정체성마저 해체당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국가였다.

우치무라가 제시한 일본적 기독교는 몇 가지 심각한 모순을 지닐 수밖에 없었지만, 김교신이 그를 벤치마킹해 정립한 '조선산 기독교'는 전능자의 숨결이 조선혼을 불러일으키는 완전한 변증법적 총합관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압제 속의 식민지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일에 전혀 충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앙과 국가'의 모순을 겪지 않았기에 김교신은 순일(純一)한 열정을 신앙과 조선에 동시에 바칠 수 있었다. 일제가 요구해온 신사참배나 종교탄압은, 국가와 신앙의 모순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이 '조선과 기독교'를 동시에 탄압하는 패악으로 인식됐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가장 치열한 기독교도이자 독립투쟁가로 흔들림없는 실천의 삶을 살아냈던 것은, 우치무라의 경우와는 달리 '모순 없는 조선산 기독교'의 힘이기도 했다.

교회 기독교의 신앙인들이 저마다 일본 황제국가의 나팔수가 되었을 때 '교회'라는 유형적 자산을 지켜야 하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김교신에게는 지켜야할 교회가 없었으며, 이미 빼앗긴 나라와 일체가 되어 있는 신앙이 있었을 뿐이었다. 신앙이 곧 독립운동이었다.

류영모가 김교신 제안 거절한 뜻

류영모는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꼽은 김교신의 성서연구회 참여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우선 우치무라에 '동의하지 않음'을 표명한 것이고, 우치무라의 방식을 실천하려는 김교신에 대해 일정한 사상적 거리를 두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왜 김교신의 제안을 거부했느냐고 나중에 제자(박영호)가 물었을 때 류영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들의 신앙내용이야 장로교나 감리교와 다를 바가 없지요."

무교회를 천명한 우치무라와 김교신이, 교회 기독교와 다름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류영모도 6년 전에 학생들에게 우치무라를 소개하며 그의 훌륭한 점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물론 교회 기독교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는 의미로 얘기한 것이다. 우치무라는 '무교회'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무교회는 교회가 없는 자의 교회이다. 즉 집이 없는 자의 합숙소라고도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챘다. 무교회는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다만 구성원이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류영모는 교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가. 깊이 사사(師事)한 레프 톨스토이의 말에 류영모의 생각이 닿아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서에서 교회라는 말은 단 두 번 사용되었다. 한번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인민의 모임이라는 의미였고, 다른 한번은 베드로와 지옥의 문에 대한 모호한 언급과 관련해서다. 교회의 개념이나 무오류성과 관련한 어떤 주장도 그리스도의 말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는 반기독교적이라고 톨스토이는 주장한다. 교회는, 생겨나는 파벌 가운데서 상대를 배척하기 위해 '이단'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무오류성을 강조하기 위해 강화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기독교의 교리를 이루고 있는 성령잉태, 예수가 보여줬다는 초자연적 기적들, 부활과 같은 대목들을 사도 바울이 기독교 신앙의 강력한 전파를 위해 삽입했다는 점도 꿰뚫고 있었다. 성서에서 기독교의 원형적인 교리가 남아있는 대목은 산상수훈이며 그 가르침은 옛 종교의 모든 규칙 대신 오직 내면적 완성과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신인 사랑만을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읽어냈다. 이런 톨스토이의 입장에서 류영모는 서구 기독교의 모든 겉옷을 벗어버린 이 사상이 가야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김교신과 비교하면, 류영모의 기독교는 훨씬 혁명적인 것이었다.
 

[김교신]

류영모와 김교신의 차이, '국가'

또 류영모와 김교신의 사상 사이에는 보다 심각하고 핵심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바로 '국가'였다. 예수는 당시의 율법학자와 예언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는 말을 듣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벗어주어라."(마태복음 5:38~40) 이 말의 뜻은 악행을 악행으로 갚지 말라는 것이다. 악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정당한 수단으로 저항해야 하지만 악으로 대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은, 기독교가 국가와 함께 양립할 수 없는 '모순과 딜레마'를 낳게 된다.

우치무라는 '일본적 기독교'를 선언했다가,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의 악행을 어떻게 기독교와 일치시켜야 할지에 대해 대혼선을 겪게 된다. 김교신은 상대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기회를 갖지도 못한 식민지 조선의 백성이었기에, 기독교와 국가를 일치시킬 수 있는 '모순 없는 교리'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가 언급한 '권력의 악행'을 금지하는 취지를 충분히 실천했다고는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지닌 근본적인 '무저항 비폭력주의'는, 군대를 유지하고 법률을 시행하는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교회는 이런 모순을 봉합하기 위해 아예 '권력'에 편승하거나 권력 자체가 되는 길을 택해온 역사가 있다.

류영모는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애국적 기독교'가 지닌 본질적 모순을 이해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국가와 동일시되거나 지나치게 단호하게 결합하는 것은 종교 자체의 타락과 모순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한 것이다. 류영모는, 식민지 조국을 해방시키는 일이 값진 가치임을 당연히 인정했지만, 국가와 종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직관했다. 국가를 구하겠다는 종교는, '국가의 모순'까지 신앙 속에 들이는 일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류영모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교회를 통해 활동하는 정통적인 신앙의 방식과 결별하여, 은거를 통한 수행으로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길을 택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활동과 류영모의 은거는,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서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직후에, 벌어진 성서조선 사태는 그에게 종교사상의 근본문제를 질문하는 계기였을 것이다. 정통신앙이었던 김교신은 억압받는 국가의 해방과 역사적 옳음을 위해 다른 국가권력(일본)의 악행에 저항했다. 류영모는 그 뜻과 의기(義氣)에는 동의했지만 신앙이 나아가야할 더 근본적인 목표를 제쳐놓지 않았다. 악행을 악행으로 갚지 않는다는 그리스도의 교리에 투철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이 하나의 큰 감옥이라고 단언하고, 작은 감옥에서의 일을 하찮아 한 것은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깨달음이었다. 세상이 감옥인 까닭은 몸나와 제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감옥 같은 인간세계의 폭력들과 악행에서 진정하게 해방되는 것은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입장과 생각을 내세워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이에게 같은 것을 강요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율(自律)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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