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면) 흥보의 돈타령, 대통령의 돈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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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정경부 부장
입력 2020-05-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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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마누라, 집안의 어른이 어디 갔다 집안이라고 들어오면 우루루 쫓아 나와 영접허는 게 도리 옳지.
계집이 이 사람아, 당돌이 앉아 좌우부동이 웬일인가, 에라 이 요망허다.
(흥보 마누라 나온다) 어디 돈, 어디 돈, 돈 봅시다. 돈 봐··· 놔두어라, 이 사람아, 이 돈 근본을 자네 아나.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술래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 돈, 생살지권(生殺之權)을 가진 돈, 부귀공명(富貴功名)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돈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 얼얼시구나 돈 봐라. 돈돈 돈돈 돈 돈 돈, 돈 봐라."


'흥보가'의 '돈타령'이다. 흥보가 매품을 팔기로 약속하고 다섯 냥을 먼저 받아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큰소리치며 부르는 소리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소불위의 위력을 지닌 돈의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 모두 돈을 원하고, 부귀공명을 이루게 하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판소리 명창들이 ‘베개 너머는 침 뱉는 돈(박봉술 창본·唱本)’, ‘돈을 옳게 보면 삼강오륜이 다 보이고, 돈을 못 보면 삼강오륜이 끊어지니(정광수 창본)’ 등으로 해석했듯이, 인간적 가치도 언제든 허물어뜨릴 돈의 무서운 실상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흥보가는 조선 사회의 빈부 문제를 가난한 자에 초점을 맞춰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조선 후기다.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빈부 격차가 심해진 시기다. 돈타령이 흥보가를 대표하는 소리가 된 이유다.

100년도 훨씬 지난 지금 2020년도 이놈의 돈이 문제다. 동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고 했다. 중국이 원인불명 폐렴 환자의 확산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알린 게 2019년 12월 31일이다. 2020년을 코앞에 두고 인간 사회는 조용한 습격을 당했고, 신출귀몰한 그 무엇이 온 지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인간 사회의 경제 시스템도 덜컹거리더니 결국 멈췄다. 이 톱니바퀴가 언제 다시 제대로 돌아갈지는 예상하기가 어렵다. 고작 서너 개월의 경제 시스템 정지에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로 죽으나, 먹지 못해 죽으나 매한가지'라며 울부짖는다.

바이러스의 위험을 알면서도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일터를 열어달라는 함성이 돈타령의 생살지권을 꼭 빼닮았다.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돈은 꼭 필요하다. 변변치 못한 가장 흥보가 간만에 마누라를 호통칠 수 있는 것도 매 맞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고 받은 계약금 다섯 냥이 있어서다.
 

[사진=http://naver.com/charlie213]

지난 25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문 대통령의 표현 하나하나는 돈이 필요하다는 간절함을 드러냈다. '전시 재정'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목숨을 잃거나 부지하는 전쟁터에서 그깟 돈이 뭔 대수겠는가? 최대한 끌어모아 쏟아부으라는 주문에 '아니오'를 외친다는 건 목을 내놓는 일이다.

현재의 경제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건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보다 훨씬 큰 대국들도 돈을 쏟아붓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예로 든 OECD 국가들의 평균 부채비율이 그렇다. 우리가 좀 더 형편이 나으니 지금은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게 재정전략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21대 총선 승리의 전리품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경제는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현재, 돈(재정)을 쏟아부어 언 발을 더 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풀린 돈을 적기에, 적절하게 회수한 적도 거의 없다는 것이 냉엄한 사실이다. 우리가 빌린 돈은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갚아야 할 빚이다.

전 세계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양적완화를 실험한 일본은 그동안 풀린 돈을 회수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돈 풀기에 들어간 미국도 테이퍼링(양적완화의 점진적 축소)이라는 말만 요란했을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그러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맞았다.

숫자에 밝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대국의 지위를 이용해 양아치 같은 말을 서슴지 않는다. 미국민의 빚을 어떻게라도 줄이겠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유라고 설명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것만이 지지율을 더 끌어올리고 재선에 도전할 비기(祕器)다.

우리는 이런 국가를 적당히 따라하면 될까? 다시 곱씹어야 할 것이 화폐다. 엔(¥)과 달러($)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기축통화다. 우리의 원화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흥보의 터전인 조선에서만 사용하던 엽전(상평통보)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이 달러와 엔보다 더 신중히 이 돈을 다스려야 하는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임기가 있는 19대 대통령의 관점에서만 이 돈을 보면 능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대통령은 유한하고 대한민국의 자손들은 무한하다. 전 세계 경제 시계(視界)는 온통 안갯속이고, 각자 자기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세계 최강 미국조차도 그러하니 굳이 남을 탓할 것도 없긴 하다.

문 대통령의 생각과 여러 경제 전문가들의 생각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갑론을박이 불가피하다.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짐을 떠넘기는 방식은 좋지 않다. 옳지도 않다. 빚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미래를 당겨 쓰는 것이다. 세상에 착한 빚이란 없다. 그냥 운이 좋으면 착한 빚이 될 뿐이다.

'돈을 옳게 보면 삼강오륜이 다 보이고, 돈을 못 보면 삼강오륜이 끊어지니···' 20세기에 활동한 정광수(1909~2003) 판소리 명창의 돈타령 해석이 새삼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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