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낸 명당 조맹묘에 몰려든 권력의 풍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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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5-0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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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풍양조씨 시조 묘와 견성암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신라 천년이 기울고 후삼국이 쟁패를 벌이던 시기에 ‘바우’라는 현자가 천마산 석굴에서 수양에 정진하고 있었다. 후일 고려를 세운 왕건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국가 경륜(經綸)을 논의했다. 왕건은 출중한 지혜를 갖춘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남정(南征)에 동참시켰다. ‘맹(孟)’이라는 이름도 하사했다.
조맹은 고려가 건국된 뒤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이라는 호를 받았고 관직이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하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후손인 풍양(豐壤) 조(趙)씨들은 그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의 묘소는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다. 풍양 조씨들이 묘소 입구에 세운 개수비(改修碑)에는 천마산의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멀리 삼각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달려가다가 천작(天作)으로 이루어진 명당(明堂)이라고 쓰여 있다.

 고려 개국공신 조맹의 묘는 조선의 선조 광해군 대애 이르러 명당을 탐낸 왕실권력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 [사진=남양주시청]


남양주의 옛 이름은 풍양현이었다. 풍양은 기름진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서울 근교 퇴계원(退溪院) 북쪽의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어 농작물 생산이 풍부했다. 
조맹이 묻힌 천작의 명당을 탐내는 사람이 많았다. 600년이 지나 조맹 묘에서 위쪽으로 서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조선왕실의 권력이 밀고 들어왔다. 이 바람에 조맹의 묘는 광해군 대에 봉분이 없는 평장이 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주가 된 후에야 복원되는 곡절을 겪었다.
선조 10년 임해군 광해군 두 아들을 낳은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떴다. 정비(의인왕후)는 왕자를 낳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 불공을 드렸지만 소생이 없었다. 공빈 김씨에 줄을 댄 측근들은 대통을 이어받을 명당을 서울 근교에서 찾았다.
왕실에서 쓰이는 각종 물품을 관장하던 제용감정(濟用監正) 정창서가 공빈 김씨의 묘산(墓山)을 찾다가 조맹 묘가 있던 산기슭에 발길이 닿았다.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들이 소개했을 것이다. 정창서는 조맹의 묘에서 표석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탈이 두려웠던지 선조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공빈 김씨의 묘가 조성된 뒤 조정에서 조맹 묘의 봉분을 없애 평장(平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논이 생겼다. 선조는 “조맹은 내게 외가 쪽으로 조상이 되는 분”이라며 봉분을 그대로 놔두라고 명했다.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묘소. 광해군은 즉위한 뒤 후궁인 모친을 왕후로, 이 무덤을 성릉으로 추존했다. [사진=남양주시청]


이 뒤로 공빈 김씨와 조맹의 묘소는 별 탈 없이 지내다 선조가 재위 41년 만에 승하하고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분란이 생겼다. 광해군이 어머니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고 묘소를 성릉(成陵)으로 승격하려 하자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는 왕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문에 ‘천한 첩’의 뜻을 지닌 유편사석(有扁斯石)이라는 고사성어가 들어 있었다. 실록을 보면 광해군은 상소문을 읽다가 집어던지고 “여염의 서민도 성공하여 명성을 얻으면 모두 현창하려는 생각을 갖는다”며 모친의 왕후 추숭과 묘의 승격을 강행했다.
성릉 주변의 묘소들이 모두 이장할 운명에 처했는데 조맹의 묘소도 포함이 됐다. 광해군은 조맹의 후손들이 있는지 먼저 알아보게 하고 상지관(相地官)과 더불어 대신들이 논의하도록 했다. 영의정 이덕형의 건의에 따라 묘소를 파내지 않고 봉분과 석물만 없애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선조는 공빈 김씨가 죽은 뒤 인빈 김씨한테로 애정이 쏠려 줄줄이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두었다.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이 정원군이다. 정원군의 첫째 아들이 능양군(인조)이고, 셋째 아들 능창군은 광해군 때 역모사건에 연루돼 죽었다. 정원군은 술만 마시다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막내동생의 죽음으로 한을 품은 능양군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됐다. 왕위를 놓고 피붙이들끼리 물고 물리고, 죽고 죽이는 권력의 풍파에 따라 고려의 개국공신 조맹의 묘는 모습이 바뀌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주(廢主)가 되면서 공성왕후(추존)는 다시 빈으로, 성릉은 성묘로 격하됐다. 풍양 조씨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쪽이었고 후손 조속(趙涑)과 조흡(趙潝)이 반정에 공을 세웠다. 인조반정 후 부호군 조수이 등은 봉분도 없고 표석도 사라진 시조의 분묘를 복구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려 인조가 받아들였다.
 

 조대비는 풍양조씨의 원찰인 견성암의 약사전을 지금의 모습으로 개수할 때 거금을 시주했다. 조선말기에 제작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조대비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개인소장]


19세기 조선에서는 순조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나이 어린 국왕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두 외척들이 정치권력을 번갈아 장악하는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강화도령 철종은 19살이었음에도 왕으로서 수업이 돼있지 않아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순조의 정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1851년(철종 2)에는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구축했다.
1857년(철종8) 순원왕후가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나고 ‘조대비’로 널리 알려진 신정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다. 풍양 조씨인 조대비는 효명세자(익종 추존)의 왕후이고 헌종의 어머니다. 조대비의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이다. 증조부 조엄(趙曮)은 대마도에 통신사로 갔다가 구황작물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왔다.
1863년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됐다.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차남 명복(命福)을 남편인 익종의 양자로 들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조대비가 대원군과 손잡고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를 종식시킨 것이다. 고종은 즉위 시 12세였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남양주에 있는 전통사찰 중에 견성암은 유일하게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풍양조씨의 원찰이다. [사진=남양주시청]


고려 중엽(1200년경)에 후손들이 시조를 기리기 위해 천마산 암굴 앞에 견성암(見聖庵)이라는 사찰을 세웠으나 설립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견성암우화루기(見聖庵雨花樓記)에 따르면 ‘고려 초에 시중이었던 조맹이 동굴에 은거하면서 약사여래의 광명을 친히 보아 원불(願佛)로 삼아 왕건을 보좌하고 개국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견성(見聖)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왔으며, 후손이 원당을 세워 약사여래를 공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독정(獨井)이라는 샘이 있는데 조맹이 수도 중에 홀로 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절 아래 사하촌(寺下村)의 이름도 독정 마을이다. 조맹이 도를 닦던 석굴에는 1975년에 세운 동상이 있다. 산신각에에 봉안된 영정을 토대로 제작됐다.
견성암은 경기 북부지역의 35개 전통사찰 중 유일하게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찰이다. 견성암은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이 주법당이다. 석가여래를 모신 대웅전은 부속건물처럼 작다. 조맹이 약사여래불을 친견했다는 불교계의 전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약사전에 걸린 견성암 현판의 글씨가 빼어난데 붓을 잡은 이의 이름을 알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약사여래 왼쪽에는 산신령,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을 모셨다. 가파른 계산을 올라가면 언덕에 산신각이 따로 있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김지원 비구니가 약사전에도 산령을 배석시켰다고 한다.

   조맹이 수도하던 석굴 안에 있는 조맹 동상. [사진=남양주시청]


견성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풍양 조씨 합동 제단 앞에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부장과 재무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공덕비가 서 있다. 조선 후기 우의정을 지냈고 명필로 이름을 날린 조상우의 신도비와 묘소도 있다.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조익, 18세기 대표적인 문장가로 칭송받은 조귀명, 영조대 탕평의 이론가로 평가받는 조현명 등도 풍양 조씨를 빛낸 인물들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철쭉과 홍매화가 길 양쪽으로 늘어서 손님을 맞는다. 4, 5월이면 겹벚꽃 다섯 그루가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견성암은 꽃 피는 봄철에 가봐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할미꽃 작약 꽃잔디 금낭화 수선화 목단 불두화…아담한 대웅전 앞에는 겹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절 마당은 활짝 벌어진 겹홍매화로 환하다. 작고한 견성암 주지 김지원 비구니가 40년 가까이 호미를 들고 꽃밭을 지성으로 가꾸었다. 올 3월 작고한 김지원 스님은 ‘솔바람 향기’ 등 시집을 다섯 권 펴냈다. 시집에는 간간이 스님의 꽃 삽화가 들어 있는데 솜씨가 범상치 않다. 절에서 만난 사람들은 “김지원 스님이 안 계셔 꽃박람회 같은 절의 모습이 유지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대웅전 앞 작은 연못에서는 무당개구리들의 짝짓기가 한창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작고 새까만 살모사를 만났다. 자연의 신비가 살아 숨쉬는 도량이었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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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선조, 광해군, 인조)
2.浦渚集, 조익
3.谿谷先生集 제13권, 장유
4.철종초 순원황후 수렴청정기의 궁인 임용 양상과 권력관계, 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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