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ㆍ순조 출생 기도 '영험 있는' 수락산 내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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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4-2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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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수락산 불암산 묘적산 수동계곡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서울 강남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 닿는 남양주에는 고단한 도심의 삶에 지친 이들에게 힐링을 제공하는 청정계곡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천년 역사를 지닌 고찰들을 만날 수 있다. 수락산 봉우리와 계곡에는 방랑시인 김시습의 전설이 서려있다. 하늘을 가린 계곡에서 보물찾기 하듯 조선시대 명사들이 남긴 암각문(巖刻文)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김시습, 세조 찬탈 이후 내원암
생육신 김시습은 21세 때인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했다. 그러다 40대에 환속해서 수락산(水落山) 내원암(內院庵) 아래 기거했다.
신라시대 창건된 내원암에는 수령 200년가량 된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내원암이 봉선사 말사이니 전나무가 많은 봉선사에서 묘목을 얻어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절 마당에는 선사시대에 산 봉우리에서 굴러떨어진 듯한 높이 4m, 폭 8m가량의 큰 바위가 이끼에 덮여 있다. 

내원암 앞마당의 이끼 낀 바위.[사진=김세구]


신라시대에 창건된 내원암은 조선 숙종 이후 왕실 사람들이 찾아오는 영험 있는 절로 이름을 얻었다. 1693년 숙종이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린 뒤 영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5살 때 홍역으로 죽고 왕비와 다른 후궁들에서도 소생이 없자 네번 째 간택후궁 수빈 박씨를 들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왕손을 얻고자 용파(龍坡)를 시켜 이 절에서 300일기도를 드려 1790년(정조 14)에 드디어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았다. 수빈 박씨의 무덤 휘경원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다. 정조는 1794년 후사를 잇게 해준 내원암에 칠성각을 지어주고 관음전(觀音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

    내원암 뒤편 마애보살상의 갸름한 얼굴과 긴 콧날이 귀엽다. [사진=김세구]


순조 철종 고종 때도 왕실자금인 내탕금을 받아 건물을 짓고 중창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후 새로 지었다.
내원암과 금류(金流)폭포 사이에는 202개의 돌계단이 있다. 조성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나무와 연륜이 비슷해 보인다. 여간한 불심이 아니고서는 가파른 바위를 깎아 이런 계단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락산은 물이 떨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수락산에는 위로부터 금류폭포 은류(銀流)폭포 옥류(玉流)폭포라는 이름이 붙은 세개의 폭포가 있다. 옥류폭포는 불법 상업시설이 가득차 경관이 훼손됐으나 최근 남양주시가 원형을 복구해 시민에게 돌려주었다. 남양주시는 2019년 3월부터 7월까지 청학천(수락산계곡), 팔현천(은항아리 계곡), 월문천(묘적사계곡), 구운천(수동계곡) 등 4대 하천과 계곡에서 불법 영업시설 및 구조물 82곳을 철거했다.
 

금류 폭포 위 바위에 세겨진 암각문 금류동천(金流洞天). 이름은 김시습이 지었고 글씨는 남양주 유생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사진=김세구]
 

폭포 꼭대기에 새긴 풍류객의 암각문
금류폭포의 꼭대기 바위에는 ‘金流洞天’이라는 큰 글씨의 암각문이 눈길을 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바위 바로 옆에는 내원암 계곡에서 유일하게 남양주시의 철거령에도 살아남은 가게가 불공에 소용되는 물품과 함께 막걸리와 전을 판다. 불자와 풍류객들을 위해 하나쯤 남겨둔 것 같다. 바로 이 가게 근처에서 김시습이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공조좌랑을 지낸 이하조의 유수락산기(遊水落山記)에는 금류동천이라는 작명(作名)을 한 사람이 김시습으로 기록돼있다. 가게 주인은 바위에 다보탑체 글씨를 새긴 이가 김시습이라고 말했지만 향토사가들은 남양주 유생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한다.
김시습은 수락산에 있을 때 동봉(東峯)이라는 호를 썼다. 수락산의 이명(異名)이 동봉이다. 동쪽은 단종이 붙들려가 생을 마감한 영월을 뜻한다. 이이의 ‘율곡집(栗谷集)’에는 김시습전이 실려 있다. 이이는 “김시습의 풍성(風聲)을 듣고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 되기에 남음이 있다”면서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서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수락산은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의 사패지(賜牌地)여서 전주 이씨들의 묘가 많다. 광해군의 세자도 폐세자가 돼 강화도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죽임을 당해 수락산에 묻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자진(自盡)했다고 기록돼있지만 실제로는 반정 세력이 죽였을 것이다. 세자는 대군보다 지위가 높으나 복위가 되지 않았다. 후손이 끊겨 묘를 찾을 수 없지만 수락산에 묘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남양주시립박물관은 겨울철 낙엽이 졌을 때 위성사진을 통해 묘를 찾아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망주석과 상석이 있는 묘만 확인하면 되니 대상을 좁힐 수 있다고 한다.
불암산(佛巖山)은 서울시와 남양주시의 경계를 이룬다. 서쪽 산자락은 노원구이고 동쪽은 별내 신도시다. 천보산(天寶山)이라고도 불린다.
불암산의 동쪽 자락 중턱에 신라시대에 창건한 불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남양주에 있는 대부분의 절들이 왕릉이나 비빈(妃嬪)이나 고관대작의 제사를 지내는 원찰 노릇을 했다. 절에 오르는 돌계단은 주위의 돌을 주워다 구불구불하게 쌓아 운치가 있다.
불암사는 총 591장의 인쇄용 목판을 보유하고 있는데 소장경이라 불린다. 인조와 정조 연간에 만들어졌다. 부드러운 자작나무 경판에 새겨진 글씨는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다. 석씨원류응화사적경판(釋氏源流應化事蹟經板) 212장은 보물 591호로 지정됐다. 불교 일화와 그림으로 구성한 불교역사화보집이다.

불암사에서 석천암으로 가는 길에는 큰 바위에 구멍을 뚫고 글씨를 새긴 바위 부도들이 여러 개 있다. [사진=김세구]


불암산에서 석천암(石泉庵)으로 가는 길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7개의 부도(浮屠)가 들어 있다. 바위를 파서 사리를 넣고 다시 돌을 다듬어 막았다. 1907년에 조성한 부도도 있었지만 글씨가 마모된 것은 더 오래 된 것 같다. 바위를 따라 조성된 계단을 한 시간가량 오르면 석천암에 닿는다. 석천암은 산봉우리 전체가 바위인 벼랑 끝에 지은 암자다. 1960년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의 발밑에서 물이 흐른다. 이 물줄기 때문에 석천암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석천암 바위에도 부도가 몇 개 들어 있다.
불암산 서쪽 기슭에는 천보사(天寶寺)가 있다. 거대한 암벽 밑에 자리잡고 있는 천보사의 기와지붕 용마루에는 코끼리 두 마리가 올라 서있다. 절마당에 서면 별내와 다산 신도시까지 내려다 보인다.
 

 불암산 석천암의 마애불. 바위 밑에서 물이 솟아 물줄기를 이룬다. [사진=김세구]


盟山誓海의 호국혼 서린 묘적사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묘적사로 오르는 계곡은 길 양편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시원한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다. 묘적 폭포도 아담하고 아름답다.
묘적사는 국왕 직속의 요원들이 군사조련을 받는 훈련도감이 설치됐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군을 훈련했다. 그러다 왜군의 공격을 받아 사찰이 전소됐다. 지금은 모두 신개축한 건물이어서 군사훈련장 시절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절 주변에는 화살 만드는 데 쓰이던 신우대 숲이 있다. 군사훈련장 시대에 화살을 조달하기 위해 조성한 숲으로 추정된다. 절 앞 동쪽 공터는 군사훈련장 시절에 활터였던 듯 화살촉이 가끔 발굴된다.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사가(私家)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이 묘비가 세워졌던 1720년(숙종 46) 무렵에는 절이 페허로 바뀌어 고종 32년(1895)까지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대웅전 앞에는 묘적사 팔각7층석탑이 있다. 수종사 석탑과 양식이 유사해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3층과 4층의 체감률이 자연스럽지 않다. 본래 탑의 높이는 9층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절에서 산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령 300년의 보리수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묘적사 주변에서는 고려청자 조각이 발견돼 이 절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절 앞에는 수령이 수백년은 족히 됐음직한 전나무들도 있다.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으로 쓰인 묘적사에는 화살을 만들던 신우대 숲이 있다. [사진=경기관광포털]


영조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복연은 이곳에서 훈련대장을 할 때 어머니 묘를 묘적산 꼭대기에 썼다. 그리고 자신도 “어머니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어머니 묘 맞은편 기슭에 묻혀 있다. 유족들은 2017년 이복연 초상화와 유물 38점을 남양주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흔히 맹산서해(盟山誓海)의 글귀를 장검에 새긴 사람이 충무공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복연이 자신의 쌍용검에 새긴 것이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굳은 뜻 충성스러움과 분개함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이복연의 묘지명(墓誌銘)을 통해서도 쌍용검에 이 글귀를 새겼음이 확인되고 있다. 두 사람이 모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충무공의 지명도가 높다보니 이런 오류가 굳어진 것 같다.
절 뒤쪽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상류인데 타인의 접근을 막는 사유지다.

시루봉 등산하고 약수물 들이키면
남양주시 수동면의 송천리 운수리 입석리 수산리 비금리 일대에는 어디를 가나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 '물골안'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동국민관광지는 울창한 숲과 깨끗한 계곡이 어우러져 수도권 주민의 여름철 피서지로 사랑을 받는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수동계곡은 남양주에서 물골안이라 불렸다. [사진=김세구]


비금계곡은 서리산 주금산 천마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주민들은 수도권 최고의 청정지역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몽골문화촌 앞에서 양꼬치 식당을 경영하는 이종숙씨는 “옛날에 수동면사무소 소재지 사람들이 비금리 사람들을 은근히 ‘산골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지금은 청정지역이 각광받는 세상이어서 판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울창한 숲 그늘이 여름철에는 최고의 피서지를 만들어준다. 높이 540m의 시루봉 등산을 하고  비금마을에서는 고로쇠 약수를 맛볼 수 있다.
수동면은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여 주변에 물골안유원지, 수동계곡, 검단이계곡 등 경치 좋은 계곡들이 줄지어 있다. 특히 검단이계곡 입구에서 비금계곡에 이르는 지역과 비금교 부근에 있는 너래바위 일대는 경관이 뛰어나다. 수동계곡은 한참 흘러가다 축령산계곡이 합류해 구운천을 이루어 북한강 대성리로 빠져나간다.
수동계곡의 몽골문화촌은 2000년 4월 남양주시가 몽골 울란바토르시와 우호협력관계를 맺고 문을 연 테마공원이다. 요즘은 계속되는 적자로 공연은 하지 않는다. 남양주시는 인근에 물맑음수목원을 개장해 가꾸어나가고 있다. 옮겨심은 나무의 지주목들이 사라질 무렵에는 ‘물골안’ 수동면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 같다.<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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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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