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포용론'이 총선 대박…야당은 내놓을 철학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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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0-04-2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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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민주당의 4·15 총선 압승 과정을 지켜보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는 포용(包容)이었다. 문재인 정권의 국정지표인 포용은 ‘국민을 너그럽게 감싸서 함께 간다’는 뜻을 갖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끝 모를 공포 속에서 당신은 과연 어느 쪽을 믿고 의지할까. 평소 말이라도 “우리 함께 가자”고 해온 포용정부 말고 달리 기댈 데가 있었을까.

통합당의 총선 참패에 대한 보다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분석 작업은 포용의 문제를 천착하는 데 있다고 나는 본다. 포용은 조어(造語)능력이 뛰어난 좌파가 그냥 만들어낸 구호(口號)가 아니다. 한국 진보의 도전과 실패, 성취의 역사가 담겨 있는 잘 준비된 이데올로기다.

진보에겐 10여년의 쓰라린 세월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이 실패로 끝났을 때 그들은 참담했다. 스스로를 ‘폐족(廢族)'이라며 자책했다. 그 새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동구 공산권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68)는 1989년 ‘역사의 종언’이란 논문에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이겼다”고 했다. 고 리영희 교수도 뒷날 회고록 <대화>(2006년)에서 이를 예견하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소회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 속에서도 성찰하고 학습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보수정권의 방심과 잇단 헛발질 끝에 촛불이 타올랐고, 그들은 마침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들고 나온 게 포용이다. 그 중심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다. 그는 문재인 정권의 포용국가 설계자다. 2016년 진보 성향 학자들과 ‘포용국가연구회’를 결성했고, 지난 대선 때는 문 캠프에서 ‘포용국가위원회’의 발족을 주도했다. 지금도 민주당 포용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정권 출범과 때를 맞춰 출간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구상, 포용국가>(성경륭 외, 2017년)에는 포용에 대한 이들의 구상과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이들은 포용국가를 Inclusive State로 번역했다). 한 대목을 옮겨본다.

“··· 우리가 포용국가를 제안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세상에서 최대한 포용하려는 사람을 이길 사람은 없다. 그런 나라를 이길 국가도 없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포용국가를 그리자. ‘우리 모두를 위하여, 약자를 위하여’ 포용국가로 나아가자.”

포용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일종의 처방이자 보호막으로 인식됐고 지금도 그렇다. 세계화가 개별국가 국민의 복지를 축소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게 보편적 인식이고 보면 포용만큼 호소력 있는 대안이 없어 보인다. “낙오자 없이 함께 가자”고, “다 함께 잘 살자”고 하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설령 그것이 불가능한 꿈, 달콤한 현혹(眩惑)이라고 비판받는다 해도 그 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포용’이란 말에 맞설 적당한 말조차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보수에선 고 박세일 교수의 ‘공동체 자유주의’와 ‘선진화론’이 거론됐지만 그가 이 정권 출범 직전인 2017년 1월 세상을 뜸으로써 논의가 더 진전되지 못했다.

통합당의 총선 참패 극복은 ‘포용’이란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데올로기로써는 물론이고 구호로써도 그 벽을 넘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보수는 이미 대북정책을 놓고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평화’라는 말을 진보가 선점 또는 독점했기에 “평화에 반대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 같은 논법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햇볕정책(sunshine policy)도, 공식 명칭은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다. 앞으로 ‘포용’을 놓고도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다. “포용에 반대해? 그럼 혼자만 살겠다는 거야?”

통합당의 선택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전통을 지켜내든가, 아니면 민주당의 포용과 비슷한 수준으로 접근(수렴)해 가거나 더 강한 포용을 내걸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절충하든가. 문 정권의 포용론자들은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에서 시장(市場)과 포용의 조화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그렇다면 통합당의 해법은 뭔가. 설마 낙수효과(Trickle Down)? 그건 아닐 것이다. 산업화시대의 주역들이 반세기 넘게 써먹은 그 주술(呪術)은 더는 먹히지 않는다.

일각에선 “다수 국민이 사회주의 포퓰리즘에 이미 순치됐다”고 말한다. 시류가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기도 쉽지 않을 터이다. 보수라면 궁극적으로 감세(減稅)와 작은 정부를 외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있는지 의문이다. 영국병을 고쳤다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는 “사회와 같은 그런 물건은 없고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있다”고 했다. 사회에 기대지 말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 하에 살라는 얘기다. 극단적인 발언이지만 진짜 보수라면 이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선거에 몇 번 떨어질 각오를 해야겠지만.

통합당에 대해 “당 해체에 버금가는 혁신을 하라”는 주문이 쏟아진다. 보수의 노선과 철학을 들이밀기도 한다. 고칠 건 고치고 바꿀 건 바꿔야 한다. 그 첫걸음이 포용에 대한 입장 정리와 대안 마련에 있다고 생각한다. ‘포용’이라는 이 두 글자 속에는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이데올로기의 모든 궤적들이 녹아 있다. 흔히 이념의 스펙트럼을 좌우로 길게 늘어놓지만 이는 결국 포용의 범위와 강도(强度)를 횡으로 펼쳐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코로나 이후가 더 무섭다고 한다. 이미 경제는 가라앉고, 실업자는 터진 봇물처럼 넘쳐나기 시작했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그 고통은 심할 것이다. ‘포용’이 작동하고, 작동해야 할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진보는 포용이라는 ‘사회적 백신’으로 이미 무장이 돼 있는데 통합당은 어떤 대안을 갖고 있나. 이제라도 머리를 맞대고 정직하게 우리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상생과 연민(憐憫)의 한계를 찾아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 대한 당의 대처가 첫 시험대가 될 것 같다. 보수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포용의 가치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이 지난한 과제를 풀어야 활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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