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32)] 위대한 영혼의 비밀…다석사상은 씨알사상이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03-25 10:39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2)] 나는 비정통이다…일제 말기에도 꿋꿋했던 스승

[다석 류영모]



씨알사상이란 무엇인가

'씨알'이란 개념을 창안한 사람은 류영모다. 스승에게서 배운 '씨알사상'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사회적 정의 실현으로 실천적 확장을 한 사람은 함석헌이었다. 씨알은 원래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기도 하다. 새끼를 부화하는 종란(種卵)을 뜻하는 낱말이며, 씨나 열매·곡식처럼 알의 형태로 된 것의 크기(굵기)를 말할 때도 쓰였다.

류영모는 이런 의미를 유지하되, 좀 더 철학적인 함의를 포괄하도록 했다. 씨알은 씨와 알이 결합된 말이다.

씨는 식물의 생명을 품고있는 작고 단단한 물질이다. 씨앗(종자)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쓰이면서 동물을 번식하는 근원 또한 씨라는 말로 쓰인다. 씨는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생명의 고리이며, 추위나 가뭄과 같은 고난의 시기에 잠재력만 유지한 채 견디는 강인한 생명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명(壽命)'이란 한정된 시간을 초월하여, 대를 이어 전승할 수 있는 것은 씨의 힘이다. 즉,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생명의 비밀을 담고 있는 셈이다.

알은 '알(卵)'과 '얼(靈)'을 모두 의미한다고 한 것이 류영모의 독창적인 관점이다. 알은 생명의 씨를 품으며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형태의 껍질을 포함하는 '씨의 확장'이다. 알은 조류나 어류·파충류와 같은 생물들이 번식하는 수단이지만, 여기선 씨를 품고 나르는 것을 두루 의미한다. 난자나 난소 같은 말에 쓰이는 게 그 때문이다. '얼'은 인간의 정신이나 생각·영적인 무엇을 가리키는 말로, 예부터 '알'과 서로 넘나든 말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가 더해지면서 '씨알'은 성령이나 영성을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용어가 된다.

씨알을 씨와 알과 얼의 결합어로 볼 때, 이 말은 '삶과 죽음의 바탕'인 씨와 생명을 탄생시키는 외형인 알, 그리고 '생명의 형이상학적 정수'를 가리키는 얼을 담고 있다. 씨알은 성령(얼나)이다. 성령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 아들이다. 씨알은 외형적인 건물이나 시스템에서 부양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서 대면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순간, 제도권 속의 기성 종교들이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씨알사상'이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이유다.
 

[함석헌]


씨알사상이 민주주의 현실개혁을 아우르는 까닭

거기에 씨알은 모든 인간이 저마다 만날 수 있는 공평한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에 관한 한 누구도 차이를 두지 않으며 평등하다. 이 사상은 예수가 설파한 기독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다. 씨알이 원래 초목의 '생명방식'인 만큼, 땅의 가장 아래쪽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기층(基層)민중을 각별하게 호명하는 뉘앙스가 있다. 민초를 일으켜 세워 국가와 사회의 바탕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통한다. 씨알사상은 불평등과 반민주를 성령의 힘으로 바로잡는 '현실개혁'까지 아우를 수밖에 없다.

제자 함석헌이 이 땅에 민주화의 씨알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민주(民主)'를 씨알님이라고 불렀다. '민'이 씨알이고 주(主)는 님이다. 씨알을 주인처럼 받드는 것이 민주정치라고 했다. 몸의 평등정신과 얼의 자유정신이 모두 갖춰져야 씨알정신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위로 난 생명(얼나)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 게 멸망이 아니다. 벗겨질 게 벗겨지고 멸망할 게 멸망해야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자란다. 거듭된 생명의 씨알로써 위로 나야 그게 사람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얼을 깨지 못하면 짐승의 새끼일 뿐이다. 씨알님을 머리에 이려고 이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가 된 것이다. 마음이 저절로 민주가 되려면 모든 것이 씨알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같은 민족 시련의 시기를 살아오면서, 류영모는 탈속한 사람처럼 고요하고 정결한 삶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얼나와 대면하는 치열한 수행을 거듭한 그는 국가나 사회의 곤경을 신앙적 각성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소에 이미 죽음에 대해 초연해져 있었던 그에게 죽음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씨알을 돋워 큰 '승리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들은 대부분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으로 투쟁지를 옮겼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민족정기를 다져가던 곳이 정주의 오산학교와 서울의 YMCA였다. 오산학교엔 이승훈을 이어 함석헌이 있었고, YMCA에는 이상재를 이어 류영모가 있었다. 혹독한 시련기에 우뚝 남은 사람은 남쪽과 북쪽을 지키고 있는 스승 류영모와 제자 함석헌이었다.

일제 탄압 속 '평화의 집회' 강연한 류영모

일제는 1938년 YMCA를 강제 폐쇄한다. 그런데 류영모와 현동완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연경반 모임을 계속했다. 총칼을 들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성(靈性)운동에 대한 탄압에는 불굴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1944년 11월 11일 류영모와 현동완은 세계평화기념일(세계 1차대전 휴전기념일) 강연모임을 가졌다. 일제 경찰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그들은 '평화'를 기리며 가르침의 자리를 연 것이다. 이때 류영모가 강연한 강의안이 남아 있다.

厶禾爲私刈禾利 左㐰在后右㐰司
(사화위사예화리 좌신재후우신사)
后正司直合一同 私事利物公共和
(후정사직합일동 사사리물공공화)
人人有口之謂㐰 口口占禾之謂和
(인인유구지위신 구구점화지위화)

사(私)·리(利)·신(㐰)·화(和)·동(同)을 파자(破字)하여 지은 한시다.

사람과 곡식을 합치면 '나(私)'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벼와 그것을 베는 것을 합하면 이로움(利)이란 말이 된다
* 즉 사리(私利, 각자에게 이로운 것)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밥을 잘 먹는 것이고 농사를 잘 짓는 것이다.

임금 후(后)자와 주장할 사(司)자는 좌우로 방향만 바꾼 자다
후(后)와 사(司)를 합하면 한가지 동(同)자다.
* 관리가 바르고 언론이 곧으면 하나로 뭉쳐진다. 밥을 잘 먹는 일과 농사를 잘 짓는 일이 두루 평화롭게 된다.

사람 인(人)에 입 구(口)를 붙이면 믿을 신(㐰)이 된다.
입 구(口)에 벼 화(禾)를 찍으면 평화로울 화(和)가 된다.
* 사람마다 입이 있으니 이것을 믿음이라 한다. 입마다 음식이 들어가면 이것을 평화롭다 한다.

이 현란한 '파자' 솜씨의 시는 류영모의 센스가 발휘된 것이지만, 당시 혹여 있을 일제의 검문에 대비해 '암호'처럼 전한 메시지 방식이었을 것이다. 전체 내용을 보면, 백성들에게 농사를 비롯한 생업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것이 우선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위해 리더와 언론들이 뭉쳐서 세상의 공화정치를 이뤄내야 한다는 말이다. 밥을 먹어야 신뢰도 생기고 평화도 생겨난다는 마지막 연은 가슴을 흔든다.

시를 잘 들여다보면, 결국 사리동신화(私利同㐰和) 다섯 글자가 나온다. "백성 하나하나에게 이로운 일은 우리 모두가 서로 믿고 화합하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가 나온다. 힘겨운 시절에 류영모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민의 생업이 보장되고 관리(공직자)와 언론이 잘 기능하는 것이 그걸 만들 수 있다는 속뜻까지 넣어놓았다. 

류영모와 함석헌, 김교신, 송두용은 일제의 강압에도 끝까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 날마다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요하던 시절에 그들은 버텼다. 태평양전쟁 와중에 평화기념식을 열었던 것도 대담하다. 발각되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뻔하다. 류영모의 '씨알'은 깊은 곳에서 암흑기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김교신의 가족사진 [사진=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류영모와, 우치무라-함석헌-김교신의 차이

스승·제자 사이에도 이견은 존재할 수 있다. 스승 류영모와 제자 함석헌, 김교신은 비슷한 방향의 길을 걸어갔지만 믿음의 핵심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가 있다. 셋이 만난 인연을 보면 서로 묘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류영모는 오산학교 시절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에게 우치무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함석헌은 이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은 일본에 갔을 때 김교신을 통해 우치무라의 집회를 소개받는다. 함석헌은 류영모의 강의 속에서 만난 우치무라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있었기에 성서연구 모임에 참여했다. 이후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류영모를 소개해준다. 

이들의 인연 사이에는 우치무라가 존재하지만, 이들의 사상이 갈리는 지점 또한 우치무라로 해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놀랍게도 함석헌과 김교신은 자신들이 따른 우치무라가 스승 류영모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기존 교회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무교회(無敎會)주의'라는 입장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삿포로농학교 시절 동기생 7명과 함께 했던 '7인형제의 작은 교회'에서의 강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목사나 사제가 따로 없는 민주주의적 교회시스템을 경험한 것이다. 거기에 강력한 애국주의자였던 그는 서양인 선교사가 재정지원을 하면서 자신들이 이룩해놓은 종교체제를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데 대해 반발했다. 그는 일본에 맞는 기독교가 따로 있다고 믿었다. 우치무라는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서양의 전통 속에서 이뤄진 신앙체제 전반을 재검토하여 동양적인 사유체계와 내면질서에 걸맞은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치무라 간조]


류영모는 우치무라의 사상이 서양기독교의 헌옷을 새롭게 갈아입혀 자국적 신앙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류영모의 사상은 그런 '외과수술'이 아니었다. 성서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었고, 서양기독교의 2000년 신앙이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인식에 도달해 있었다. '교회'라는 시스템은 바울의 교의신학을 통해 발전되었고 기독교를 획기적으로 전파하는 데는 공헌했으나 그 과정에서 예수가 전해준 본질에서는 벗어나게 됐다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다석은 왜 비정통기독교를 자처했나

류영모는 스스로를 '비정통(非正統·unorthodoxy)'이라고 불렀다. 비정통은 기존 교회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신앙의 방식 전체를 일거에 부정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서서 정통성에서 벗어난 입장을 지니고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류영모에게 이 문제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얼나'라는 내 안의 하느님을 직면하는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생애 내내 하느님과 소통하던 방식이기도 했다. 교회나 교의 혹은 사도신경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각자가 추구해야 할 투철한 자율신앙이었다. 우치무라에게선 이 위대한 각성과 실천이 빠져 있거나 희미해져 있었다. 우치무라는 '정통신앙'의 타율신앙에서 이탈하지 않은 무교회주의였기 때문이다. 

우치무라의 성서모임에 나가던 김교신은 1927년 귀국하여 우치무라의 무교회신앙을 전파할 뜻을 세운다. 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성서조선'을 내기로 했다. 김교신은 함석헌으로부터 류영모를 소개받고 그에게 성서연구회 활동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류영모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노'였다. 나중에 제자(박영호)가 그때 거절한 까닭을 물었을 때,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들의 신앙내용이야 장로교나 감리교와 다를 바가 없지요."

류영모에게는 친구와 지인 목사들이 많았다. 친구 중에는 홍병선·배선표·김우현·양주삼이 있고, 지인 중에는 김현봉·엄두섭·최인화·문정길이 있다. 그가 목사들과 성경이나 교리를 가지고 토론해본 적이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목사들과 성경 얘기를 안 했어요. 할 필요가 없지요. 신앙은 다른 대로 같습니다." 

1928년 함흥 영생고녀에 있던 김교신은 서울 양정고보로 옮겼고, 함석헌도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고보의 교단에 섰다. 함석헌은 서울에 오면 꼭 김교신을 데리고 류영모를 찾았다. '성서조선' 동인들은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때 성서연구 회원 수련회를 갔다. 김교신은 류영모를 강사로 모시고자 했으나, 류영모는 사양했다. 하지만 늘 모임에는 참석했다. 당시 집회 안내장에는 강사명단에 류영모가 올라가 있으나, 강의내용은 빠져 있다. 

성서동인들은 류영모 앞에서는 모두 몸가짐과 말을 조심했다. 류영모는 하루 종일 꿇어앉은 채로 여러 강사의 강의를 진지하게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회원들의 자유토론 시간이 되면 다양한 이야기로 시끌시끌했으나, 류영모는 가만히 미소를 지은 채 말없이 듣기만 했다. 밤 10시경에 류영모는 북한산 기슭의 후미진 오솔길을 걸어서 혼자 구기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류달영의 증언). 이렇게 말이 없는 류영모를 김교신은 '정신적인 구두쇠'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중에 류영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괜히 서로 충돌하여 남의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16세에 입교하여 23세까지는 십자가를 부르짖는 십자가신앙이었지요. 우치무라는 외국선교사를 반대하여 사도신경에 입각한 기독교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웠습니다. 나는 무교회의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우치무라나 무교회는 정통이지만, 나나 톨스토이는 비정통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편집 및 정리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아주경제와 컴패션의 따뜻한 동행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