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는 딸 축복…유배지 다산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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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1-2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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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딸을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 담은 매조도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정약용은 원래 6남 3녀를 두었으나 천연두 등의 질병으로 인해 4남 2녀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9남매 가운데 농아(農兒)라는 아이가 있었다. 1799년에 태어나 1802년에, 그러니까 겨우 세살 때 홍역을 앓다 숨을 거두었다. 그때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정약용은 “그 애의 무덤에서 곡(哭)하고 싶은” 심정으로 편지를 써 남양주 마재마을로 보냈다. 그 편지 내용 가운데 일부를 읽어본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 겨우 세돌일 뿐인데, 나와 헤어져 산 것이 2년이나 된다. 사람이 60년을 산다고 할 때 40년 동안이나 부모와 헤어져 산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네가 태어났을 때 나의 근심이 깊어 너를 농(農)이라고 이름 지었다. 얼마 후 우려하던 대로 집안에 화(禍)가 닥쳐 너에게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려 한 것이었는데, 그게 죽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는데. ··· 이곳 강진의 이웃 사람이 남양주에 간다고 해서 그분을 통해 소라 껍데기 두장을 너에게 전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네 어미는 편지에 ‘강진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농이가 소라 껍데기를 찾았는데 소라 껍데기가 없으면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숨을 거둘 무렵 소라 껍데기가 도착했습니다’라고 쓰셨다. 아, 참으로 슬픈 일이다. ··· 나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살아난 아이가 2남 1녀이고 죽은 아이가 4남 2녀이니, 죽은 아이들이 살아 있는 아이들의 두배다. 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잔혹함이 이와 같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정약용이 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1813년 강진 유배지에서 그린 매조도. 참새 두 마리는 딸과 사위를 상징한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편지의 내용이 절절하다. 이런 일까지 겪은 터였기에 정약용은 남양주에 두고 온 딸아이가 더욱 그리웠다. 1801년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날 때 막내 딸은 일곱살이었다. 어린 딸을 두고 귀양 떠나는 아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때 두 아들 학연, 학유는 열여덟, 열다섯이었다. 폐족(廢族)의 위기였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꾸역꾸역 힘든 시절을 견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 딸은 어찌할 것인가.
유배 생활 내내 정약용은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딸이 잘 커서 1812년 드디어 시집을 갔다. 귀양살이 12년째, 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신랑은 강진 다산초당 제자인 윤창모(윤영희로 개명)였다. 아비의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딸을 위해 유배지 강진에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딸이 시집간 이듬해인 1813년, 남양주 부인이 보내온 비단 치마를 떠올렸다. 3년 전 ‘하피첩(霞帔帖)’을 만들고 남은 천에 딸을 생각하며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작은 새 두 마리. 바로 ‘매조도(梅鳥圖)’다. 정약용은 화폭 맨 위에 그림을 그리곤 그 아래에 큼지막한 글씨로 시 한편을 적어 넣었다.
“저 새들 우리집 뜰에 날아와/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매화향 짙게 풍기니/그 향기
사랑스러워 여기 날아왔구나/이제 여기 머물며/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주렁주렁 매실도 열리겠지(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蕡其實)”
시의 내용이 애틋하면서도 따스하다. 이어 정약용은 시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도 함께 써넣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지 몇해 지나 부인 홍 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경계의 말을 적어 족자 4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候裙六幅 歲久紅琥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嘉慶十八年癸酉七月十四日冽水翁書于茶山東菴).”

1953년 허백련 화백이 초의대사의 ‘다산초당도’ 원본을 보고 모사한 그림. 초의의 그림을 모사했지만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다.[개인소장]


3년 전 만들었던 하피첩의 머리말과 그 내용이 흡사하다. 그런데 ‘매조도’ 그림은 좀 단순해 보인다. 매화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이게 전부다. 크기도 아담한 편이다(45×19cm). 그림을 좀 더 눈여겨보자. 여기서 두 마리 새는 1년 전 시집간 딸의 부부를 상징하지 않을까. 다시 보니, 새는 너무 작아서 활짝 핀 매화 송이보다 약간 더 클 뿐이다. 세상에 매화 꽃송이만 한 작은 새가 어디 있을까. 이것은 아마도 자식을 앳되게만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속에나 존재하는 새가 아닐까. 두 마리의 새가 참새인지 동박새인지 아니면 직박구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새의 부리에 붉게 칠한 색깔이 참 예쁘다.
그림은 반듯하고 단정하다. 그림 속 매화와 참새는 맑으면서 처연하다. 그런데 참새 두 마리는 먼데 한 방향을 보고 있다. 한길을 가는 부부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딸과 사위가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아버지 정약용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림에 적어 넣은 제시(題詩) 가운데 특히 ‘이제 여기 머물며/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주렁주렁 매실도 열리겠지’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결혼한 딸과 사위가 아이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하지만 먼 데를 바라보는 참새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애잔함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은 이 ‘매조도’를 딸과 사위에게 주었다. 그림은 이후 사위와 외손자의 집안(윤창모 가문)을 거쳐 고려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애틋한 그림 ‘매조도’는 2016년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하피첩’과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정약용이 유배 당시 갓 태어난 소실의 딸에게 그려줬다는 매조도. 진위를 둘러산 논란이 있다. [개인소장] 


2009년 6월,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또 한 점의 ‘매조도’가 공개되었다. 전시 주최 측은 정약용이 강진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소개했다. 정약용에 관심 있는 사람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매조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다산 매조도가 한점 더 있다고?”
그림을 보니 고려대 박물관 소장 ‘매조도’와 비슷하다. 크기도 비슷하고 전체적인 분위기, 그림의 소재와 표현, 화면의 구도, 글씨체 등이 많이 흡사하다. 화면 위쪽의 그림은 매화 나무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 모습이다. 아래쪽으로는 큰 글씨로 제시를 써넣었고 그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 있다.
그림에 써넣은 시를 보자.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깃이 예쁜 작은 새/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겠지(古枝衰朽欲成槎 擢出靑梢也放花 何處飛來彩翎雀 應留一隻落天涯)”
이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는“시구의 맥락으로 미뤄 다산이 유배 생활 중 소실에게서 얻은 딸 홍임을 떠올리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흥미로운 추정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속 글에 따르면, 정약용은 1813년 8월 19일에 이 그림을 그렸다. 고려대 박물관 ‘매조도’를 그리고 한달 뒤에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정약용은 1813년 강진에서 소실로부터 딸을 얻었다. 시집 간 남양주의 딸에게 ‘매조도’를 그려준 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정약용은 해배령(解配令)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해배령이 집행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귀양생활을 마치고 고향 남양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소실에게서 얻은 이 딸은 어찌할 것인가. 그 걱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 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그림 속 시 가운데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겠지”라는 구절이 바로 이런 상황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정약용이 갖고 있다가 친구 이인행에게 주었고 그것이 후손들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뒤늦게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정약용의 진품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조심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정민 교수의 견해는 엄밀히 말하면 추론이고, 고려대 박물관 ‘매조도’와 비교해보면 그림의 분위기가 다소 다른 면도 있다. 색감도 약간 차이가 난다. 좀더 정밀하고 과학적인 분석과 논의가 필요하다.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복원될 때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김휴림의 여행편지]

 


1820년 강진 문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시 '남당사(南塘詞)'에따르면 다산은 남양주 마재마을로 돌아오면서 소실 모녀를 함께 데려왔다. 하지만 소실은 마재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다산초당으로 돌아가 사모하는 마음과 원망을 동시에 안고 연못과 꽃나무 주변을 서성였다. 다산의 정실 홍씨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민 교수는 이렇게 추론한다. “정약용이 처음 다산초당에 정착했을 때는 이웃 백련사의 혜장(惠藏) 스님이 보내준 젊은 승려 한 명이 부엌일을 맡아 했다. 이후 다산초당에는 18명의 제자들이 늘 와글와글했다. 온종일 공부하고 편집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이들의 밥과 밑반찬은 누가 해주고 다산의 수발은 누가 들어주나. 빨래도 만만치가 않았다. 다산은 이런 형편에서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였으리라. 당시에 이것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편을 유배지로 떠나보낸 후 갖은 뒷바라지에 지쳐버린 아내를 납득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18년 유배지를 떠나 남양주로 돌아간 다산은 제자에게 "홍임이 모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산연구자인 박석무 전 의원은 이 편지를 읽어본 윤재찬(다산 제자의 고손자)을 만나 소실과 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박 전 의원은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매조도는 국보급이지만 소실 딸에게 준 것으로 전해지는 매조도2의 존재는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외로운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남양주의 딸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매조도’에는 미안함과 고마움, 딸 아이를 향한 애툿한 부정(父情)이 진하게 담겨 있다. 18년의 긴 유배 생활. 딸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기에 정약용은 그 시련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남긴‘매조도’는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그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의 여유당(與猶堂) 가는 길, 마재고개를 넘으며 정약용과 딸을 생각하고 ‘매조도’풍경을 떠올려본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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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 다산의 재발견, 휴머니스트, 정민
2.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 신구문화사, 오주석
3.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영사,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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