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생가 여유당의 하피첩은 왜 '진품명품'까지 갔나

입력 : 2020-01-21 17:22

<21>다산 정약용 '하피첩'의 귀향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2006년 4월 KBS ‘진품명품(珍品名品)’녹화장. 중년 남성 이모씨가 고문서(古文書) 세 권을 들고 나와 감정을 의뢰했다. 그는 “몇 년 전 고물상 할머니로부터 우연히 얻었다”며 “감정가는 15만원 정도로 예상한다”고 했다. 고문서를 살펴보던 김영복 감정위원(문우서림 대표)은 두어 줄 읽어 내려가다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하지만 언제부턴가 행방이 묘연했던 ‘하피첩(霞帔帖)’이었기 때문이다. 하피첩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강진 유배시절에 만든 서첩이다.
유배 생활 10년째인 1810년, 남양주에 있는 부인 홍씨가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5폭짜리 빛 바랜 치마를 보내왔다. 시집 올 때 입었던 명주 치마였다. 그 치마를 받아든 정약용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정약용은 치마를 오려 남양주에 두고 온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游.1786~1855)을 위해 작은 책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치마를 책장(12x16cm) 크기에 맞춰 여러 장으로 잘라 한지를 포개어 붙인 후에 얄팍한 서첩 4권을 만들고 거기 가르침을 주는 글을 써 내려갔다. 그게 바로 하피첩이다. 여기서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정약용은 부인이 보내준 빛바랜 치마에 이렇게 멋진 이름을 붙였다. ‘하피첩’1첩의 머리말을 보자.
 

디산 정약용이 제작한 '하피첩' 세권.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내가 강진(탐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纁袡 · 시집갈 때 입는 붉은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랬고 황색마저 옅어져 서첩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를 잘라 마름질하고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전한다. 훗날 이를 보고 감회가 일어 어버이의 자취와 흔적을 생각한다면 뭉클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피첩이라 이름 붙인 것은 ‘붉은 치마’라는 말을 바꾸고 숨기기 위해서다.
(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帔帖 是乃紅裙之轉讔也)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정약용이 가장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폐족(廢族)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형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난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늘 근면과 수양, 학문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하피첩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하피첩에 나오는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경(敬)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라(敬直義方․경직의방)”“내가 너희에게 전답을 남겨 주지는 못하지만 평생을 살아가는 데 재물보다 소중한 두 글자를 주겠다. 하나는 근(勤)이요, 또 하나는 검(儉)이다. 무엇을 근이라 하고 무엇을 검이라 하는가” “명심하고 당파적 사심을 씻어라” “사대부가의 법도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바로 산기슭에 거처를 얻어 처사(處士)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만약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해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정약용은 아들을 위한 훈계를 세세하게 적었다. 때론 엄격하고 때론 자상하다. 공부하는 법과 마음가짐뿐 아니라 집안이 몰락해도 자존감을 잃지 말고 훗날을 도모하라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피첩은 유배객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주는 교육적 메시지였다.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과 당부가 절절하면서도 담담하게 녹아 있다.
 

  한강 변에 있는 마재마을의 집들은 홍수에 대비해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높았다. 여유당 근처에 남아 있는 박문수 어사 집의 주춧돌.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하피첩은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에 보관하고 있던 중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될 위기를 맞았다. 그해 여름 한강이 범람하면서 여유당 마당으로 물이 밀려 들었다. 정약용의 4대손 정규영(광동학교 교장을 지냄)은 하피첩과 다산의 서궤(書櫃)를 안방 다락방으로 옮겼다. 밤이 되자 한강물은 안방으로 넘어들어와 허리에 찼다. 급보를 들은 마을의 구조선이 와서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정규영은 “다산 전집을 건져내지 못하면 죽어도 못나간다"며 응답하고 서궤를 등에 짊어지고 헤엄쳐서 집을 나와 배에 올라탔다. 그는 배에서 내려 집 뒤 언덕을 올라가 다산 묘소에 책 궤짝을 내려놓고 일장 통곡을 했다.  
  여유당 등 한강변에 있는 집들은 가끔 있는 홍수에 대비해 추춧돌이 높았다. 4차례나 어사(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병조판서를 지낸 박문수의 아흔아홉칸 집이 여유당 근처에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박문수 집의 주춧돌을 보면 높이가 50cm~1m나 된다. 그렇지만 한강물이 지붕마루를 넘어간 을축 대홍수에 높은 섬돌과 주춧돌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정규영이 빠져나온 후 여유당은 배가 되어 떠내려갔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다산의 저작을 구한 이야기는  최익한(당시 동아일보 조사부장)이 동아일보에 1938년 12월부터 반년 동안 연재한 글 '여유당 전서를 독(讀)함'에 들어 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지만 하피첩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6·25 전쟁 때였다. 정약용의 5대손이 피란길의 와중에 수원역 근처에서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하피첩을 정성 들여 피란 보따리에 싸고 수원역으로 피란길에 올랐으나,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만 분실하고 만 것이다.

 1925년 대홍수로 다산 생가 여유당이 배처럼 둥둥 떠내려가
 정약용 4대손이 책 궤짝 지고 헤엄쳐 나와 구했지만···
 전쟁 때 피란길에 분실···TV 쇼에 나온 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하피첩의 존재에 관한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그런 하피첩이 2006년 TV 프로그램 ‘진품명품’ 녹화장에 등장했으니, 눈 밝은 김영복 감정위원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하피첩을 감정 의뢰한 이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건물 인테리어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보니 건설 현장, 철거 현장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2004년 어느 날, 이씨는 수원의 주택 철거현장 쓰레기 더미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폐지를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때 이씨는 할머니 리어카 바닥에 깔려 있는 고문서 세 권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에게 “폐지를 내줄 테니 그 고문서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고문서 세권은 그에게 넘어왔다. 그리곤 2년 뒤 ‘진품명품’에 감정을 의뢰한 것이었다. 하피첩은 원래 네권이었지만 이렇게 해서 세권이 살아남게 되었다.
수원의 이씨는 이것이 하피첩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15만원 정도로 예상했다. 그러나 하피첩임을 알아본 김영복 감정위원에겐 그 가치가 15만원일 수 없었다. 하피첩의 가치와 의미, 내력 등을 훤히 알고 있는 김 위원은 감정가로 1억원을 제시했다. 엄청난 가격이었다. 이씨도 당연히 놀랐다. 너무 놀라 정신이 없어 돌아가는 길에 운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피첩 중 두 아들에게 근검(勤儉)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된 의뢰인 이씨. 방송이 나간 후 몇 달 뒤, 그는 이것을 팔아 돈으로 바꾸고 싶어 김 감정위원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김 감정위원의 조언에 따라 우선 강진군과 매매 논의를 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만든 서첩이니 강진군에서 매입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김 감정위원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씨가 값을 너무 세게 불렀던 모양이다. 재정이 넉넉지 않은 강진군으로서는 거액의 문화재 구입 예산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러고 얼마 후 하피첩은 김민영 당시 부산저축은행 대표에게 넘어갔다. 김 대표는 고미술계에서 유명한 컬렉터였다. 특히 고서 전적류(典籍類) 분야에서 귀중한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그가 구입한 뒤 2010년 하피첩은 보물 1683-2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이 파산하면서 김 대표의 재산 가운데 하나인 하피첩이 예금보험공사에 압류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하피첩은 2015년 9월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부쳐졌다. 그때 경매에 나온 고서들은 모두 김민영 부산저축은행 대표가 소장했던 것이다. 하피첩을 비롯해 ‘경국대전(經國大典)’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보물로 지정된 것만 17건이 경매에 나왔으니 김민영 컬렉션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당시 경매에선 출품작의 가치와 특성을 감안해 개인 응찰을 막고 공공기관만 응찰할 수 있도록 했다. 경매에 응한 기관은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 남양주의 실학박물관 등이었다.어느 박물관이 하피첩을 차지할지에 경매 시작 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치열한 경합 끝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실학박물관을 제치고 7억5000만원에 낙찰 받았다. 당시 서울옥션의 낙찰 예상가 4억원을 훌쩍 넘긴 액수였다.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에 있는 다산동암의 현판. 정약용은 1810년 다산 동암에서 하피첩을 만들어 남양주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냈다. [사진=이광표]


남양주의 입장에서 보면 하피첩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피첩을 직접 소장하지는 못해도, 마음만 먹으면 국립민속박물관으로부터 하피첩을 대여해 전시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국립민속박물관도 개방적이다. 다른 곳도 아닌, 정약용의 고향인 남양주이기에 하피첩을 대여해 전시하는 일은 그 명분도 충분하다. 실제로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선 ‘하피첩의 귀향’ 특별전이 열렸다. 1950년에 행방불명되었다 그 존재가 다시 확인되어 남양주를 다시 찾은 것이니 66년 만의 귀향이었다.
남양주의 부인 홍씨는 왜 강진으로 치마를 보냈던 것일까. 정약용은 남양주 시절부터 비단으로 책 표지를 종종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된 천이나 치마에 글씨를 써 이를 아담한 서첩으로 만들어 종종 지인들에게도 선물했다. 그래서 부인이 강진 유배지로 자신의 해진 치마를 보낸 것이 아닐까. 남편의 글쓰기 습관을 잘 알고 있던 부인은 글쓰기로 시련을 견디는 남편을 위해 빛바랜 치마를 보낸 것이었으리라. 그건 결국 홍씨 부인의 진한 그리움이었다. 거기에 정약용은 하피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곤 남양주 마재마을 한강의 붉은 노을과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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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 하피첩-부모의 향기로운 은혜, 국립민속박물관, 정약용
2. 다산의 재발견, 휴머니스트, 정민
3. 책의 기운 고서의 향기, 서울옥션(고서경매 하이라이트)
4.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영사, 이덕일
5. 최익한 전집3 여유당 전서를 독함, 서해문집, 최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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