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8-5] 남산 위에 철갑 두른 소나무의 소름돋는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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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9-12-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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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는 한국엔 선비, 일본에선 사무라이 상징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사(士)는 한국에선 으레 문사인 선비로, 일본에선 무사인 사무라이로 통한다. 중국에선 문사와 무사를 불가분적으로 통칭하는 뜻으로 쓰인다. 각계각층의 엘리트 사(士)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제각기 다른 해석이 다른 역사를 낳았다.

이는 한·중·일 국민 모두 애지중지하는 ‘소나무’의 이미지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시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하략) - 김민기 작사 <상록수>


한국인에게 소나무가 주는 이미지는 성삼문 시조 ‘낙락장송 독야청청’과 '상록수'의 ‘눈보라 쳐도 끝까지 푸른’ 선비의 의연함과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반면, 일본은 소나무의 철갑 입은 사무라이의 용맹을 상징하고 있다. 소나무 껍질이 일본 사무라이가 입는 철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본인들은 소나무를 표현할 때 철갑을 두른 듯한 모양이란 표현을 즐겨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 수많은 조선 양민을 학살한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長政(흑전장정)]의 철갑과 투구, 배경이 철갑을 두른 소나무다[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철갑은 사무라이의 상징이다. 일본의 전통 무사인 사무라이의 복장은 철갑이다. 일본은 사무라이가 입었던 철갑을 국보로 지정한 것만 해도 12개나 된다.(1)*

철갑을 입은 사무라이의 배경에 어김없이 소나무 그림이 등장한다. 실재로 이와쿠니현, 오카야마현, 야마쿠치 현과 시즈오카현의 하마마쓰(浜松)시, 후쿠시마현의 나카마쓰(若松)시, 나가노현의 마쓰모토(松本)시 등을 비롯한 일본 각지에는 철갑을 입은 소나무가 산재해 있다. 특히 일본에서 철갑 두른 소나무라 하면 제일 먼저 시즈오카(靜岡)현 하마마스시 중심부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철갑두른 소나무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철갑을 두른 소나무

도쿄 남쪽 인접 현 시즈오카현의 최대 도시 하마마쓰시는 일본 20개 정령시(政令市, 한국의 광역시 격)의 하나다. 하마마쓰는 예로부터 소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출세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에야스는 29세부터 46세까지 17년간 하마마쓰를 근거지로 삼고 해마다 전쟁을 치렀다. 1573년 겨울 전투에서 패배하여 하마마쓰성으로 돌아왔다. 입고 있던 철갑을 벗어 소나무에 매달아 두고 쉬었다.

바로 이 소나무가 후세에 철갑을 두른 소나무 개괘송(鎧掛松, 요로이가께마쓰, Armor suspendid pine tree)다. 원래 철갑 두른 소나무의 명칭은 적장들의 목을 베어 수급을 보관하는 수실검송(首實檢松)이라 불렀다.

하마마쓰(浜松)시 중심에 위치한 도쿠가야 이야에스의 철갑을 두른 소나무(鎧掛松) 1992년 4월 25일 현일왕(아키히토) 결혼기념일에 안내판을 설치했다.[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868년 메이지 유신후 시즈오카 번주는 철갑 두른 소나무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1919년 도쿠가와 후손들이 토지를 정부에 기부했다. 1925년 3월 25일, 하마마쓰시는 황태자(전 일왕 아키히토)의 결혼기념일에 ‘개괘송(鎧掛松, 철갑 두른 소나무)’ 세 글자를 새긴 석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개괘송은 1932년 9월 9일 태풍 피해로 고사했다. 하마마쓰시는 그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었으나 그것마저 1945년 5월 미공군의 공습으로 소각됐다. 현재의 개괘송은 3대째로, 1982년에 식수한 것이다. 1992년 4월 5일, 황태자(현 일왕 아키히토) 결혼기념일에 안내판이 세워졌다. 원래의 개괘송은 지금 자리에서 서북쪽 20여미터 하마마쓰성의 목책 부근에 있었다. 일본에서 철갑 두른 소나무하면 바로 이 하마마쓰의 개괘송을 가리킨다.

(왼쪽) 하마마쓰시가 1925년 황태자 결혼기념일에 ‘鎧掛松’ 글자를 새겨 세운 석비.(오른쪽)하마마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7년간 근거지이자 출세지, 하마마쓰시내엔 철갑두른 소나무 개괘송이외에도 이에야스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2. 도쿄 남산 후지산의 철갑을 두른 소나무

일본인들은 자기네 성산이자 최고봉 후지산(富士山, 3776m)을 남산(南山)이라고 별칭한다. 일본의 수도, 도쿄의 남쪽에 위치한 산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현대 일본의 상징인 눈 덮인 후지산의 모습은 후지산의 남쪽 부분, 즉 시즈오카현 쪽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출세지이자 그가 갑옷을 걸어놓은 소나무로 유명한 시즈오카현의 최대도시 하마마쓰시 사람들이 후지산을 남산이라고 부른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창씨개명 이토지코, 일본 제국의회 귀족의원 1866~1945년)는 15세의 나이에 1881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한 이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이자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창시자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제자를 자처하는 등 젊은 시절 십수년을 도쿄를 중심으로 생활했음을 참조 바란다.

일본 옥션 경매 캡쳐 1916년(다이쇼 5년)소인이 찍힌 우편엽서, 도쿄 남산 후지산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3. 도쿄의 동남단 핫케이자케언덕 철갑을 두른 소나무

에도 후기의 유명화가 우다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는 1833년 출간한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핫케이자케(八景坂鎧懸) 언덕의 철갑을 두른 소나무 또는 하마마쓰(浜松)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미나모토 요시라는 헤이안(平安)시대 말기의 무장이 동북지역 승리를 기원하며 자신의 갑옷을 소나무에 걸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핫케이자케 언덕은 오늘날 도쿄 최남단 구인 오타(大田) 지역 오모리 역 부근이다. 그런데 오타구 지역의 소나무는 품명 자체가 철갑소나무라는 의미의 개송(鎧松, 요로이마쓰 armor pine tree)으로 각별히 보호에 힘쓰고 있다.

4. 일본 남악들의 철갑 두른 소나무

일본에는 미나미다케(南岳)라고 부르는 명산이 8개나 된다. 시즈오카현, 가고시마현, 기후현, 후쿠시마현, 나가노현, 니가타현, 홋카이도 현에 위치한 남악들이 그것이다.

특히 나가노현 마쓰모토(松本)시의 해발 3033m의 남악, 나가노현 마쓰가와(松川)촌 소재 해발 2246m 남악, 도쿄 남산 후지산 남쪽 산자락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소재 해발 2072m 남악, 후쿠시마현과 니카타현 사이에 위치한 해발 1390m의 남악들은 철갑을 입은 사무라이와 같은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유명하다. 이들 남악 부근에는 철갑을 입은 소나무(鎧松)가 산재해 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5. 일본의 남산, 고야산의 고야마쓰

1910년대 조선신궁 근처 남산 풍경, 철갑을 두른듯한 소나무는 없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일본에는 남악 말고도 남산으로 불리는 곳이 여럿 있다. 현 수도인 도쿄의 남부 시즈오카현의 후지산)을 비롯해 효교현, 시즈오카현, 가가와현, 이이치현, 이바라키현, 미야기현의 남산 등 남산들이 그것이다.

일본의 옛 수도 교토의 남부 와카야마현의 고야(高野)산 소나무 고야마쓰(高野松, 또는 고야마키高野槇)로 유명한 고야산을 지칭한다. 교토의 남산 고야산의 고야마끼들은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들이 스크럼을 짜듯 철갑을 두른 듯 서 있다.

요컨대 애국가 2절의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의 소나무가 우리나라 서울 남산 위의 소나무일 가능성은 '0(제로)'에 가깝다. 반면, 일본 남산 위의 ‘철갑을 두른 소나무’ 요로이 가께마쓰(개괘송)가 확실시 된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9월과 11월에 각각 현충사와 도산서원에서 일본 소나무를 퇴출했듯이 일본의 철갑두른 소나무가 심어진 ‘가짜 애국가’를 하루빨리 퇴출하고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시작하는 의미에서 국민의 뜻과 지혜를 모은 ‘진짜 국가(國歌)’를 제정하길 촉구한다.


◆◇◆◇◆◇◆◇주석

(1)*철갑함 후소(부상扶桑, 무궁화 나무 나라의미의 옛국호)는 1878년 일본제국 해군의 철장갑 전함이다. 1894년 청일전쟁의 황해해전과 1905년 러일전쟁당시 뤼순봉쇄작전에 투입되어 큰 전공을 세운 전함이다. 다음 해 1898년 3월 21일, 다시 띄워지면서, ‘후소 호’는 2등 전함으로 재분류되었다. 크루프 대포를 장착하였다. 수리는 1900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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