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40대 기수론] YS·DJ부터 ‘386’까지…한국 정치사 40대기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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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기자
입력 2019-10-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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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주의 분기점 평가…명분과 의지로 기성세대 돌파

“40대 기수론은 원로 정치인들이 독점하던 우리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나이와 세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김영삼(YS)·김대중(DJ) 후보의 확실한 명분과 강한 의지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최근 40대 기수론의 의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상도동 핵심 인사가 이렇게 답을 했다.

50년 가까이 지난 2019년 다시 40대 기수론이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지금 정치권의 현실이 암울하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식물 국회’, ‘일하지 않는 국회’ 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다시 한 번 개혁과 혁신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특히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편이 갈려 집회가 열리는 현 상황은 비정상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YS가 불 지핀 야당 대통령 후보의 자격

40대 기수론은 1970년 당시 44세였던 김영삼 의원이 1971년에 치러질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지명전에 나서면서 야당 대통령 후보의 조건과 자격에 관해 주창한 논리를 말한다.

40대 기수론이 탄력을 받은 것은 김대중(45세)·이철승(48세) 의원도 뒤따라 출마를 선언하면서다. 결과가 뻔히 보이던 후보 지명전의 판세는 3명의 40대 후보들의 출사표로 출렁거렸다.

이후 1970년 9월에 열린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유진산 총재는 자신과 같은 다수파인 김영삼 의원을 후보로 지명했고, 1차 투표에서 김영삼 의원은 상당한 차이로 최다득표자가 됐다.

하지만 유 총재의 행동에 반발한 이철승 의원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김대중 의원에게 투표하라고 권함으로써 2차 투표에서는 소수파인 김대중 후보가 지명을 받았다.

김영삼 후보는 결과 승복하고 추종자들에게 소수파 후보를 지원해줄 것을 당부, 김대중 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정치적 미성년’ 평가 절하 속 ‘양김’의 시행착오와 시련

시련과 상처도 있었다. 지명전 과정에서 유진산 총재는 ‘정치적 미성년’, ‘구상유취(口尙乳臭·입에서 젖 비린내가 난다)’는 식의 공세로 40대 기수론을 폄하하기도 했다.

김대중 후보는 결국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94만표차로 석패한다. 이를 시작으로 1972년 유신체제 등장하게 된다. 김대중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의 기간은 총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투옥됐다. 10년간 55차례, 183일의 가택연금을 당하고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김대중은 1997년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10번 나와 6번 당선된 국회의원 선거를 포함해 김대중은 평생 14번의 선거에 출마해 7번 당선된다.

김영삼은 김대중에 앞서 1992년 제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12번의 선거에서 10번 당선돼 ‘승률’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16·17대 국회에 대거 입성한 ‘젊은 피’ 사례

40대 기수론을 펼쳤던 김영삼·김대중은 새로운 정치를 위해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공천에 세대교체와 인재영입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의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막판의 레임덕을 ‘세대교체론’으로 돌파, 원내 1당을 수성했다.

전문가 그룹으로는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리던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의사 출신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영입됐다. 민중당 출신으로 강성 재야 운동권이었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전 의원도 신한국당에 발을 디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는 15대 총선때 천정배·추미애·정동영·신기남 등 전문가 그룹을 영입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전대협 출신인 이인영·우상호·임종석 등 1980년대 운동권을 대거 영입해 이른 바 '386' 세대가 탄생했다.

2004년 17대 총선은 선거에 물갈이론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시기로 꼽힌다.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맞은 위기를 젊은 인재 수혈로 타개했다. 물론 당시에는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리더십에 크게 기댄 측면이 있었다.

현재는 당의 지도부급으로 성장한 나경원·유승민·이혜훈 의원이 40대 정치 신인의 대표 주자다.

문재인 대통령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영입을 통해 정권교체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486' 표창원·조응천·이철희 의원에 1970년대생인 박주민·김해영 의원도 정치권에 입문했다. 


 

1985년 3.6전면 해금조치로 5년만에 동교동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씨가 활짝 웃으며 포옹을 하는 모습. 고 김대중 대통령 왼쪽으로 이희호 여사가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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