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쓰러트린 '大韓' 비석 일으킨 능참봉을 아시오?

입력 : 2019-10-16 16:19

   [스토리 기행 시리즈] ⑦조선 최초의 황제 무덤 홍릉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교수 공동집필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서울 경복궁 광화문(光化門)에서 총성이 울렸다. 낭인과 수비대원 등을 앞세운 일본군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경복궁 담장을 넘어 들어가 광화문 빗장을 열었다. 거의 동시에 북쪽 대문인 신무문(神武門), 북서문과 북동쪽 소문인 추성문(秋成門)과 춘생문(春生門)으로 일본군이 밀고 들어갔다. 이들의 기습에 궁궐 수비대는 순식간에 장악되었다. 궁궐 수비대엔 이미 내통자가 있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 패거리들은 경복궁의 북쪽 가장 깊숙한 곳, 건청궁(乾淸宮)으로 몰려갔다. 당시 고종과 황후가 기거하던 곳이다. 고종의 침전은 장안당(長安堂), 왕후의 침전은 곤녕합(坤寧閤)이었다. 일본군 패거리 40~50명은 침전을 둘러싸고 황후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곤녕합 동쪽 옥호루(玉壺樓)에서 황후는 끝내 낭인들에게 붙잡혔다.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명성황후는 살해 위협 때문에 사진촬영을 기피해 실제 모습으로 확인된 사진이 없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의 초상.
 

​"일본 낭인들은 황후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고 얼마 후 그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황후의 시신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무자비한 만행이었다. 그 비극의 현장이 바로 건청궁 옆 녹산(鹿山)이다. 이곳엔‘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 석비가 세워져 있다. 이른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식민지시대도 아니었는데, 우리의 왕비가 우리의 궁궐에서 이방인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역사에 수많은 상처와 오욕이 있지만 을미사변은 전대미문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전대미문의 치욕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일본의 후안무치(厚顔無恥), 왕권의 미약함, 정부의 무기력, 열강들의 침탈…. 이 상황에서 우리는 황후의 죽음을 발표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압박에 의해 황후를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는 일이 이어졌다. 정부는 12월 1일에 되어서야 황후의 죽음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경기도 구리 동구릉(東九陵)의 숭릉(崇陵) 옆에 능을 조성하기로 하고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정했다. 산릉(山陵)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이듬해인 1896년 1월 중단되고 황후의 국장(國葬)은 무기 연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암중모색 끝에 고종은 1897년 2월 덕수궁(경운궁)에 자리를 잡고 그해 10월 자주독립국과 근대국가로서의 희망을 담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와 달리 사진을 많이 남겼다.  


고종은 1896년 12월 황후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1897년 1월 서울 청량리를 장지로 다시 정하고 능호를 홍릉(洪陵)으로 정했다. 천장(遷葬) 공사가 시작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1897년 11월 21, 22일 황후의 국장이 진행되었다. 사후(死後) 2년 만이었다. 그 홍릉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이 있는 곳이다. 그 후 고종은 명성황후를 참배하기 위해 청량리까지 전차를 놓기도 했다.
1900년 들어 청량리 홍릉의 터가 풍수지리적으로 허(虛)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고종에게 상소도 올라왔다. 고종은 남양주 금곡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천장과 산릉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4년경 남양주 홍릉 조성사업은 중단되었다. 대한제국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형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홍릉 조성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무효를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고종은 1910년 국권상실 후 일제로부터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했다. 뇌일혈로 쓰러졌다고 알려졌지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한 의사가 비소를 넣어 홍차를 만들었고 고종이 그걸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는 소문이었다.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지만, 조선 백성들은 분노했다.

24년만에 죽어서야 다시 만난 황제와 황후

어쨌든, 1904년 중단되었던 남양주 홍릉 조성공사는 고종 승하와 함께 다시 시작됐다. 1919년 2월 16일 명성황후가 청량리에서 먼저 옮겨왔고, 3월 3일 고종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격랑의 시대를 살았던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 그들은 24년 만에 죽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남양주 홍릉은 기존의 조선 왕릉과 달리 참도 주변에 다양한 석물들을 두 줄로 도열하듯 배치해놓았다. 이는 중국 황릉의 방식을 도입해 대한제국 황제로서의 위상과 권위, 근대국가를 향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남양주 홍릉은 고종 부부의 합장릉이다. 홍릉은 그 모습부터가 기존의 왕릉과 다르다. 정자각(丁字閣) 대신 일자 모양의 침전(寢殿)이 있다는 점, 참도(參道) 주변에 석물이 두 즐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 둥근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조선 왕릉은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뒤로 난 참도를 따라가면 정자각이 나온다. 그 뒤로 왕의 시신이 묻힌 능침(陵寢)이 있다. 정자각은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지붕이 정(丁)자 모양이라고 해서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른 왕릉엔 정자각이 있는데 홍릉에는 정자각 대신 일자 모양의 침전이 있다.
홍릉의 특징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참도 주변에 설치한 석물이다.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석물들이 두 줄로 도열하듯 배치되어 있다. 문석인, 무석인은 높이가 3.8m에 달한다. 조선시대 왕릉의 문석인, 무석인 가운데 가장 크다. 모두 기존의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이다.

홍릉의 능침에는 난간석, 병풍석, 장명등 등이 설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 석수(石獸)는 보이지 않는다. 인물과 동물의 조각물은 중국 황제릉처럼 참도 주변에 배치했다.[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조선의 전통적인 왕릉에서는 석물은 능침 주변에 있고 정자각 앞 참도에는 박석(薄石)만 깔려 있다. 그러나 홍릉은 다르다.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은 조선 왕릉의 형식을 따라 능침 주변에 배치했다. 반면 문석인, 무석인과 석수(石獸)는 능침 주변이 아니라 참도 주변에 배치했다. 이는 중국 명나라 태조 효릉(孝陵)의 방식이다.
이처럼 커다란 석물을 도열하듯 배치한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고종은 1897년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끝내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고종과 순종은 왕이 아니라 황제였다. 그러니 무덤도 황제의 무덤이어야 했다. 고종은 1900년 남양주 금곡으로 능을 옮기고자 했을 때부터 중국의 황제릉을 참고하기 시작했다.

황제릉은 제국 향한 마지막 자존심의 표현

홍릉과 유릉은 그래서 황제의 무덤 양식이다. 조선 왕릉의 전통을 따르되 중국 황제릉의 형식을 도입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황릉처럼 여러 석물을 도열하듯 두 줄로 배치함으로써 그 위용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중국에 버금가는 대한제국 황제국으로서 자존감의 표현이었다.
홍릉의 침전 옆 비각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다. 앞면에는‘大韓/高宗太皇帝洪陵/明成太皇后祔左(대한/고종태황제홍릉/명성태황후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원래 청량리에 명성황후의 홍릉을 조성할 때 제작되었다. 훗날 고종이 승하할 때를 대비해‘大韓/○○○○○洪陵/明成○皇后○○’의 여덟 글자만 새기고 나머지 자리를 비워놓았다. 나머지는 고종이 승하하면 채워 넣겠다는 생각이었다.
 

홍릉에 서있는 석비. 일제의 박해로 고종 승하 후 비각 안에 방치되다 1922년 능참봉 고영근에 의해 비로소 비문이 완성됐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그런데 일제는 1919년 고종 승하 후 ‘대한’이란 두 글자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제는 두 글자를 삭제하려 했고 이로 인해 석비는 비각 안에서 4년 동안 나뒹굴었다. 방치되던 석비를 온전하게 세운 사람은 홍릉 참봉이었던 고영근(高永根)이다. 그는 1922년 인부를 동원해 비석의 앞면에 글자를 채워 넣어 비문을 완성한 뒤 일본인들 몰래 석비를 제대로 세워놓았다. 그리곤 며칠 뒤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나아가 순종에게 ‘허락없이 비를 세운 죄’를 고하면서 석고대죄(席藁待罪)하였다.
이 사실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고 일본은 이 석비를 다시 눕혀놓고 싶었지만 한국인의 반발이 거세질까 두려워 그냥 묵인하기로 했다. 대신 뒷면에 일본 연호를 새겨 넣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고영근은 참봉에서 쫓겨났다. 현재 석비의 뒤를 보면 한 구석에 몇 글자를 새겼다가 지워버린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 일본 연호를 지워버린 것이다.
고영근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자원해서 홍릉의 능참봉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 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우범선(禹範善)을 죽이기도 했다. 그 사건으로 일본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부탁으로 5년만 복역한 뒤 1909년 조선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고영근은 명성황후 집안 덕분에 벼락출세를 하고, 명성황후의 충직한 신하로 살다 생을 마쳤다.
 

고영근씨 사진과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1922년 12월 13일자


남양주 홍릉은 고종이 살아 있을 때, 청량리의 명성황후 홍릉을 옮기기 위해 조성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 생전에 홍릉 천장(遷葬)은 실현되지 않았다. 고종 사후 명성황후가 남양주로 먼저 옮겨오고 곧이어 고종이 합장되었다. 고종은 자신의 능호도 갖지 못한 채 명성황후의 홍릉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고종은 남양주 홍릉은 황제릉으로 꾸미고자 했다. 비록 1919년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시대에 조성되었지만 그 홍릉엔 고종의 꿈이 서려 있다. 대한제국의 자존감, 근대 독립국가를 향한 열망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좌절되었다.
남양주 홍릉에는 시종 절절한 사연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지난했던 비극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홍릉에선 매년 1월 21일 고종의 제향을, 매년 10월 8일엔 명성황후의 제향을 거행한다. 요즘 고종 시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고종시대는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제공한다. 남양주에서, 홍릉에서 그 지난했던 근대사의 속살을 만날 수 있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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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2. <대한제국 황제릉>, 김이순, 소와당
3. <건청궁, 찬란했던 마지막 기억>, 문화재청, 눌와
4.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한형우,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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