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아닌데···선조의 부친 묘, 덕릉으로 불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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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19-10-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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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흥국사와 덕흥대원군 묘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교수 공동집필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1530∼1559)의 묘는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 자락에 있다. 묘소 아래 20m 지점에 서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거북 등 위에 중국에서 수입한 대리석을 올렸다. 남양주에는 대군과 대신들의 수많은 신도비가 있지만 덕흥대원군 신도비를 받친 거북이 가장 우람하다. 덕흥대원군 오른쪽에 묻힌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영의정을 지낸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의 증손녀다.

서자의 아들 선조, '아버지 지위' 높이기 위해 안간힘

선조에게는 서손(庶孫) 콤플렉스가 있었다. 태조가 적자들을 제치고 계비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왕자의 난을 당한 조선에서 서손이 왕이 되는 것은 조선 초기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는 명종의 후사가 없어 조선왕조 최초로 서손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서자(庶子)였고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선조는 어떻게든 덕흥대원군을 덕종으로 추존해 출생 콤플렉스를 벗어보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 그 대신 1569년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칭호를 높였다. 조선시대에 왕이 아니면서 아들을 왕으로 둔 대원군이 4명 있었는데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의 시초다.
 

덕흥대원군의 신도비는 대형 돌거북 위에 중국에서 수입한 대리석 비를 올렸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명종은 중종의 정비 문정왕후 소생이고,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다. 그러나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서 덕흥 대원군의 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입적해 왕위를 계승했다. 일찍 죽은 덕흥대원군에겐 모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명종이 가끔 불러 조카들을 테스트 해보고 그중 가장 똑똑한 셋째 아들(선조)을 점지했다고 한다. 명종이 죽었을 때 두 형과 달리 선조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외척의 세도에 시달리던 신하들까지 적극 찬동했다.

덕흥대원군은 8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해 12살 미성년과 20살 처녀가 신방을 차렸다. 나이 많은 처녀에게 조혼시켜 일찍 손을 두려는 집안 어른들의 발상이었다. 덕흥대원군은 2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열다섯에 큰아들을 낳기 시작해 3남 1녀를 두었다. 덕흥대원군을 과년한 처녀에게 조혼시킨 것이 막내아들의 대통 승계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전주 이씨 족보에는 한동안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출생연도가 적혀 있지 않았다. 연령차가 많이 나는 결혼을 후손들이 부끄럽게 여겼던 것같다. 최근에야 후손들이 역사서를 참고해 출생연도를 메워 넣었다.
 

덕흥대원군은 12살 때 8살 연상의 처녀와 결혼했다. 오른쪽이 정인지의 증손녀 하동 정씨 묘.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왕릉 아닌, 왕릉 같은 위세··· 212cm 무인석 세워
 

선조 이후 모든 조선의 왕들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주가 됐지만 인조 역시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의 장남이다. 덕흥대원군은 선조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조선왕조에서 명멸한 수많은 군(君)의 하나로 잊혀졌을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 직계의 손이 귀해지면서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이라면 파를 가리지 않고 몇 대가 흘러도 군(君) 작위를 받는 정식 왕족으로 인정됐다. 전주이씨 덕흥대원군 파는 선조 때부터 같은 항렬을 쓴다.

선조는 왕릉 같은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212㎝ 높이의 무인석을 아버지 묘소의 좌우에 배치했다. 문인석과 달리 무인석은 원래 왕릉에만 세울 수 있었다. 선조는 생부의 묘를 덕릉으로 추존하는데 실패한 뒤 꾀를 냈다. 남양주에서 나무와 숯을 실은 수레를 끌고 동대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디를 지나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어 덕묘나 덕흥대원군 묘소를 거쳐왔다고 하면 그냥 보내고 “덕릉을 지나왔다”고 답하면 시세를 후하게 쳐주고 샀다. 이렇게 임금 아들의 효심 어린 노력으로 나무꾼들을 통해 대원군묘의 호칭이 덕릉으로 민간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경기도가 기념물 앞에 세운 표지판에는 ‘덕흥대원군 묘’라고 표기 돼있지만 그 앞을 지나는 도로는 덕릉로이고 서울상계동에서 남양주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덕릉 고개다. 덕릉마을에서 덕릉터널로 이어져 손자 선조의 노력이 후세에 빛을 보았다.

왕의 할머니를 첩이라 불러야 한다는 신하 주장에···

어전회의에서 강관(講官) 허봉이 덕흥대원군의 어머니를 첩모(妾母) 라고 부르며 "대통을 이어받은 임금(선조)은 첩모를 할머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는 “‘말로써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 안빈은 실제로 조모인데 우리 할머니라고 한다 해서 무엇이 해롭단 말인가”고 화를 낸 기사가 선조실록에 나온다. 이에 좌상 홍섭이 “나이 젊은 사람이 옛글만을 읽고 실제 경험이 부족해 너무 지나친 표현을 했으니 임금께서 포용하셔야 합니다”라고 “만약에 이와 같이 기를 꺾으신다면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 못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라고 진언했다. 임금 앞에서도 신하들이 목을 걸고 할말을 하던 조정의 모습을 실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육각정 만월보전은 정조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작품.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은 덕흥대원군에게 평점이 후하지 않다. 명종 7년 사헌부에서 “덕흥군의 성품이 교만하고,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창기에게 빠져 변복(變服)으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파직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이에 명종은 “나이가 어리고 사리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막는다.

명종 9년에는 사헌부에서 “덕흥군의 노비 10여명과 동지(同知) 정세호의 노비 10여명이 도망가 숨어 있는 종의 모자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고 때리고 빼앗아갔다”고 문제 삼았다. 이에 사관(史官)은 “덕흥군은 종실의 무식한 사람이니 논할 것도 못 되지만 정세호는 재상을 지낸 사람으로 남의 종을 빼앗으면서도 꺼리는 바가 없으니 심하지 아니한가”라는 논평을 달았다.

필자와 덕릉에 동행한 이는 “조선의 대군 중에는 7공자 스토리 같은 게 많다”고 조크를 했다. 덕흥대원군 신도비 아래 쪽에는 선조의 큰형인 하원군(河原君)의 묘소가 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덕흥대원군의 묘소는 일자(一字) 병풍석 8개를 둘렀고, 후에 조성된 부인의 묘소는 일자 병풍석을 끝에서 약간 구부려 멋을 부렸다. 하원군의 묘소는 아예 곡선형 병풍석이어서 시대가 갈수록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뀐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덕흥대원군의 사저이자 선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도정궁(都正宮)은 150칸이나 되는 궁궐로 사직동 근처에 있었다. 도정궁 경원당은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이전해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보호되고 있다.
   

덕흥대원군의 원찰인 흥국사는 대방을 지으면서 왕실의 석재를 가져다 기단을 쌓았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민간에서 덕절이라고 부르는 흥국사(興國寺)의 기원은 신라 진흥왕 시절까지 올라간다. 승려 원광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락사(水落寺)라고 했다. 조선 선조 1년(1568) 선조가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이 절에 건립하고 덕릉의 '덕'자를 따서 흥덕사(興德寺)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인조 4년에는 사찰명을 흥국사로 고쳤다. 흥국사는 덕릉으로부터 400m 떨어져 있다.

흥국사는 '덕릉'의 원찰···선조가 흥덕사 편액 내려

만월보전은 시왕전 뒤쪽에 석축을 쌓아 한 단 높인 대지 위에 지은 건물로 사찰 건물로는 유례가 드물게 6각정이다. 1793년(정조 17) 이전의 건물로 추정된다. 1878년 건립된 만세루 대방(大房)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H 자형 건물이다. 현재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은 누, 방, 부엌 같은 부속공간을 함께 갖춘 독특한 형태다. 덕흥대원군 묘의 재실을 겸해 제사 때 사람들이 자고 묵으면서 음식을 만들었다. 근대기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건물로 전통적 방식을 벗어나 사찰의 여러 기능을 통합 수용한 것이다. 만세루 대방은 왕실의 석재를 가져다 기단을 쌓아 이대로 두어도 몇백년은 더 버틸 것 같다.

           흥국사 대방의 편액. 왼쪽에 흥선대원군의 호인 '석파(石坡)' 낙관이 선명하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흥국사는 판각과 탱화를 제작하는 화승(畵僧)을 교육하고 배출하는 학교의 역할도 했다. ‘흥국사’ '영산전'편액, 만월보전과 영산전 기둥에 걸린 주련에 석파(石坡)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남아 있다. 석파의 글씨는 힘이 있고 개성이 강하다. 추사체의 영향을 받아 회화적인 미(美)도 담겨 있다. 흥선대원군도 덕흥대원군의 직계 후손이다.
 덕릉과 흥국사가 있는 수락산은 덕흥대원군 후손에 왕이 내려준 사패지(賜牌地)로 경관이 좋아 조선 문인들이 찾아 수많은 시화를 남긴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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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 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민족문화대백과사전
3.남양주 흥국사 만세루방 연구, 손신영,강좌미술사 34호
4.흥선대원군 발원 불화의 양상과 특징, 신광희, 고궁문화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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