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일으킨 권력, 흙으로 눕다…광릉 대권무상(大權無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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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19-09-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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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광릉의 원찰(願刹)인 봉선사 입구에서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길에는 수령이 100년을 넘은 키 큰 전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다. 광릉 재실(齋室)에서 홍살문까지 가는 길은 소나무와 전나무 같은 키 큰 나무들이 들어차 터널처럼 하늘을 가린다. 죽은 자와 산 자를 갈라놓는 숲길이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의 좌우 언덕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를 따로 모셨다.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드론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울창한 숲속에 'V' 자를 파놓은 것 같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은 정자각의 양쪽 언덕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돼 하늘에서 보면 울창한 숲속에 'V'자를 파놓은 것 같다. [문화재청 제공]

광릉은 여타 조선왕릉과 다른 특색을 많이 지니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에 이르는 길에 박석(薄石)을 깔지 않았다. 강원도와 강화도에서 나오는 박석을 채석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고생이 심했다.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의 왕릉 조성공사를 2년 간격으로 치른 세조는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검소한 왕릉을 만들라는 유교(遺敎)를 내렸다. 광릉은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봉분이 작고 석물의 규모도 크지 않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흙에 바로 묻어라"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만들지 말고, 무덤에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고 일렀다. 석관 대신에 목관을 쓰고 그 사이를 석회석으로 메웠다.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는 배려였지만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유골이 빨리 썩는 매장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의 기둥돌에 옮겨 새겼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형 문종의 왕릉이 동구릉에 있지만 세조는 죽은 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문종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칠 것만 같았다. "수양 이노옴, 내 아들의 임금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영월로 보내 죽여놓고서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세조는 동구릉을 피해 남양주 광릉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기구한 약연이 따라왔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다가 사후(死後)에 광릉 가까이로 온 것이다. 사릉(思陵)은 세조의 능에서 15㎞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정자각에서 보아 세조의 오른쪽 언덕에 묻혀 있는 정희왕후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에 사전에 정보가 새나가 수양대군이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남편의 거사를 격려한 여장부였다. 선조 때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기의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해 감찰상궁이 정희왕후 집을 찾아간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궁궐에서 마음에 둔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 그런데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었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됐다.
 

광릉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숲길은 전나무와 소나무가 터널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다. [김세구 전문위원]

 사후 53년···단종비 정순왕후도 남양주 묻혀

정희왕후는 둘째 아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별세하자 일찍 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지산군(성종)을 왕위에 앉혔다. 12살 임금 성종 뒤에 발을 치고 조선 최초로 7년 수렴청정을 한 여인이다.

수양대군(세조)은 계유정난의 피바람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은 무사들을 데리고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죽였다. 55년 전 이방원(태종)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가 정도전을 죽인 것에서 본뜬 듯하다. 이후 단종의 명을 빙자해 영의정부사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의정부 좌찬성 이양 등을 궁궐로 들어오라고 해 입궁하는 족족 살해했다. 이날 의금부 도사와 삼군 진무를 시켜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이우직을 강화로 압송했다.

수양대군은 궁정 쿠데타 직후 스스로 영의정부사와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겸하면서 전권을 틀어쥐었다. 실록은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돼 있다. 정난(靖難)은 나라가 처한 병란이나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오종록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세조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이라는 논문에서 계유정난이 아니라 ‘숙부의 난’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논평했다. 계유정난을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顧命大臣)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왕권을 위협해 세조의 쿠데타를 불렀다는 것이다.

노산군을 상왕으로 올리고 세조가 왕이 된 뒤에도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세조는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가 드러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영월로 유배 보냈다.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를 문종의 합장릉에서 끌어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어 안산에 묻혔다가 문종이 승하한 뒤 합장됐다. 그러나 현덕왕후의 친정 식구들이 사육신의 모의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세조는 현덕왕후의 신분을 서인으로 강봉하고 문종 능에서 파내 평민의 예로 개장했다.

세조는 남양주 풍양궁에 자주 묵으며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했다는 기사가 성종실록에 나온다. 세조는 이때부터 광릉을 자신의 묘역으로 정하고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은 능지 후보를 놓고 종친및 조정 신료들과 논의를 거듭하다 23일만에 광릉으로 정했다고 예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과 김명원이 기록한 광릉지(光陵誌)에는 "세조가 광릉 근처에서 사냥 구경을 하다가 후일 자신이 묻힐 곳으로 잡아두었다" "화소(火巢)를 넓게 정하고 수목을 많이 심으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화소는 산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수목이 없는 공간을 말한다. 

남양주 광릉, 강원도 월정사, 부안 내소사는 한국의 3대 전나무 숲길로 꼽힌다. 다 자란 전나무는 높이가 20~40m나 된다. 높은 언덕에 조성된 광릉의 능상에 오르면 전나무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의 침엽수 숲이 천군만마처럼 도열한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숙종은 광릉에 갔을 때 언덕이 가파르고 두 능 사이가 넓어서 옥체가 피로를 느낄 수 있다면서 신하들이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고 두 능에 모두 올랐다(숙종실록).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세조릉에 서면 나무의 바다 같은 광릉숲이 내려다 보인다. [김세구 전문위원]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는 세조와 깊은 인연이 있다. 상원사에는 세조가 쓴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이 남아 있다. 세조 12년(1466년)에 조성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221호)의 복장유물에서는 피고름 얼룩이 묻은 어의(御衣)가 나왔다. 세조는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 주변의 온천과 불당을 자주 찾았다. 세조는 피고름이 묻은 어의를 문수동자상 속에 넣으며 악성종기가 깨끗이 낫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세조가 조카와 신하들을 살생하고 권력을 찬탈하는 반인륜의 악행을 저질러 악성종기가 생겼다는 민중설화가 있지만 문종 세조 형제가 모두 종기로 고생했다. 문종은 세종 밑에서 29년 동안 세자로 있다가 보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종기가 악화해 승하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조선의 역대 왕 27명 가운데 12명이 종기를 앓았다. 위생이 나쁘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돼 천년의 숲이라고 불린다. 월정사 일주문부터 금강문까지 1㎞의 전나무 숲길에는 30~40m 높이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서있다. 임금이 되어서도 월정사 상원사를 찾았던 세조에게 전나무 숲길은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세조가 월정사 전나무 씨앗을 가져다가 광릉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지만 광릉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전나무는 수령이 180년 정도다. 이해주 국립수목원 산림박물관장은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 때 광릉에 잣나무와 전나무 330 그루를 심었다. 세조가 전나무를 심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계유정난은 '숙부의 난'으로 불러야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 입구에서 광릉으로 가는 길에는 키 큰 전나무가 줄지어 서있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다. [김세구 전문위원]

단종(1441~1457년)이 왕이 됐을 때 나이는 11살이었다. 단종의 할머니인 소헌왕후와 모친 현덕왕후가 모두 세상을 떠나 수렴청정할 사람도 없었다. 성종도 12살에 왕이 됐지만 '세조의 장자방'이라 불리던 한명회가 장인이었고, 7년 동안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해 안착할 수 있었다. 한명회는 정희왕후와 뜻이 맞아 두 딸을 예종비인 장순왕후, 성종비인 공혜왕후로 만들고 왕의 장인(국구·國舅)으로서 영의정을 두 번 지냈다.

세조는 14년간 재위하면서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단행하고, 밖으로 중국에 대해 자주성을 높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호적 호패법 강화로 인구조사를 통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변방 방어체제를 정비하고 명나라와 연합작전으로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냈다. 조선 왕조의 기본법전을 만들고자 ‘경국대전’ 편찬을 주도했다.

세조가 권력을 장악하고 즉위하는 과정은 잔인무도했다. 그러나 그가 국왕으로서 남긴 업적은 사학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백은 ‘한국사’<근세전기편>에서 ‘세조의 즉위 후 치적은 다대하여 태종 세종을 거쳐 확립된 국가의 기초가 세조에 의해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광릉의 능참봉들이 산림을 가꾸고 지키어 한국의 대표적인 국립수목원의 기반을 닦은 것도 세조의 사후(死後) 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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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세조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인문과학연구 제31집
4.<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방성혜, 시대의 창
5.광릉숲 600년 1, 김은경 이해주 이정호, 국립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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