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민족학교 설립' 첫발, 가슴이 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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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입력 2019-09-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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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추석 연휴를 지내고 뜻깊은 행사에 다녀왔다.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 선생을 기리는 자리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 출판 기념회와 ‘최재형 민족학교 설립추진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민간단체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가 주도한 뜻깊은 자리다. 김재윤 상임집행위원장도 힘을 보탰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도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한마음으로 최재형을 기억하고 기렸다.

최재형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근에야 조명 받고 있다. 최재형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다. 그래서 100년 전 그가 남긴 자취를 돌아보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공교롭게도 행사장에서 국회는 한달음 거리다. 국회는 이날도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따른 정쟁으로 날카롭게 대치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과 대한민국 국회가 대비됐다. 100년 전 선조들은 후손들이 기억해주길 바라며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 순정한 단심(丹心)뿐이다.

그들은 빼앗긴 빛을 되찾기 위해 처자와 재산, 목숨을 온전히 소진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내년은 최재형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0년 되는 해다. 딸 올가와 아들 발렌틴이 아버지를 회상하며 쓴 책이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다. 최재형 선생이 들려주는 육성을 대신해 본다. 최재형이 남긴 유산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실천하는 삶, 드러내지 않는 리더십, 신분을 뛰어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최재형은 망한 대한제국에 빚진 게 없었다. 그는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를 두었다. 양반계급은커녕 부쳐먹고 살 땅조차 없었다. 유학자로서 갚아야 할 의리도 없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독립지사들과는 출신 성분부터 달랐다. 삼한갑족도, 명망가도, 고명한 유학자도 아니었다. 빈천한 몸뚱이가 전부였다. 그러기에 헌신해야 할 명분은 희미했다. 그럼에도 압록강을 건넌 연해주에서 누구보다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기에 많은 기회가 뒤따랐다. 막대한 부를 일군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축적한 부는 아낌없이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9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의무보다 독립운동을 앞에 두었다. 고려인들에게 소, 돼지를 키우게 하고 농사를 독려했다. 동포들로부터 농축산물을 사들여 러시아 군대에 납품했다. 물 설고 낯선 땅에서 동포와 함께하는 삶이었다. 도로공사 하도급을 받아 일감도 나누어주었다.

크라스키노에서 우수리스크까지 도로 건설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동포들을 대신해 부당한 임금 차별을 막았다.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고려인들은 그를 ‘페치카’라고 부른다. 그에게 벽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만큼 어울리는 애칭은 없다. 그는 독립운동가와 고려인에게 언 몸을 녹여주는 벽난로였다. 우수리스크 생가 기념관 한쪽에 페치카가 있다. 혹한의 땅에서 페치카는 생존과 직결된다. 연해주 땅에서 최재형이란 존재가 그렇다.

드러내지 않는 리더십은 최재형을 기억하는 또 다른 통로다. 역사는 이토 히로부미 심장에 총탄을 박은 안중근만 기억한다. 그러나 이토 저격까지는 수많은 이들이 함께했다. 우선 단지동맹에 가담한 동지 12명이 있다. 그들은 안중근과 함께 독립을 염원하며 무명지를 잘랐다. 또 최재형은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떠나기까지 온갖 수발을 도맡았다. 거처를 제공하고 총과 신분증,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역사는 보이지 않는 이들이 빚은 결과다.

최재형은 이토 저격 이후에도 물밑에서 움직였다. 역사가 뒤늦게 최재형을 기억하는 이유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첫 재무총장을 맡았다. 그는 상해에 가는 대신 여비를 아껴 독립운동에 보탰다. “그런 돈이면 총 한 자루 더 살 수 있다”며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실천하는 삶, 드러내지 않는 리더십, 신분을 초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재형은 그렇게 헌신하다 1920년 4월 일제에 의해 삶을 마감한다. 연해주에서 큰 별이 졌다.

최재형이 국내에 알려지기까지 100여년이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최재형기념사업회가 있었지만 도무지 불이 붙지 않았다. “가슴이 시리고 부끄러웠다.” 우연하게 최재형을 알게 됐다는 소강석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그는 6년 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온 뒤 언론을 통해 최재형 알리기에 앞장섰다. 국회 안민석 위원장도 흔쾌히 뜻을 모았다. 지난 8월 우수리스크 현지에서 열린 흉상 제막은 그런 결실이다.

이제 최재형은 외롭지 않다. 많은 이들이 그를 기린다. 후손도 고국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4대손 초이 일리야 세르게예비치는 이달부터 인천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의를 듣는다.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할아버지의 나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소강석 목사는 박환 수원대 교수와 문형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김근수 선교사에게 공을 돌렸다. 소 목사는 “최재형 선생이 둔 11남매 가운데 9명이 스탈린 치하에서 사형당하거나 유배됐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안민석 위원장과 소강석 이사장은 네 가지를 약속했다. 최재형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제작, 교과서에 최재형 수록, 최재형 민족학교 설립, 전경련 회관에 최재형 흉상 건립이다. 최근 사단법인 돌바내 회원들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온 박래군 운영위원장은 “묵묵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최재형 선생이 우리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시공을 뛰어넘어 100여년 전 선조들이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을 되새길 때다”라고 강조했다.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책무가 우리 앞에 놓였다.

 

문희상 국회의장(뒷줄 가운데)과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오른쪽)가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CCMM빌딩 그랜드홀에서 열린 '나의 아버지 최재형 출판기념 북 콘서트 및 최재형 민족학교 설립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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