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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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입력 2019-09-0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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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역사는 씨줄과 날줄이다. 영광과 치욕스런 궤적이다. 자랑스럽고 부끄러운 흔적이 맞물려 역사를 만든다. 한민족사도 마찬가지다.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다.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너른 들판에 서면 이 말을 실감한다. 연해주는 고구려와 발해(698~926)가 운영했던 고토(古土)다. “우리 땅이었다”는 값싼 자기위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독립운동사에 빛난 치열한 땅에 대한 가슴 벅찬 기억이다.

우리에게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는 치욕이다. 반면 불꽃처럼 타올랐던 연해주 독립운동사는 훈장이다. 우리가 연해주에서 100여 년 전 기억을 헤집는 이유다. 크라스키노,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 가슴 미어지는 집단기억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세계 7번째 ‘5030클럽(인구 5000만 명, 국민소득 3만 달러)’ 가입이 그렇다. 스스로 묻고 답했던 연해주 기행을 반추해 본다.

최재형과 신한촌이 그 중심에 있다.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사에서 기둥과 같은 존재다. 그는 연해주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냈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갔다. 무역업과 군납으로 부를 쌓았다. 그 돈으로 죽기 전까지 독립운동 지원하고 독립운동가를 키웠다. 학교와 교회, 신문사를 세워 거점으로 삼았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상/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촬영]



안중근 의사와는 거사 직전까지 함께했다. 브라우닝 권총을 사고, 하얼빈 행사장에 들어가는 대동공보 기자증을 만들어 주었다. 또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집에서 저격 연습을 하도록 배려했다. 결국 하얼빈에서 거사는 안중근과 단지동맹 12명, 최재형이 함께한 것이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4일 일제에 체포돼 숨졌다. 4월 참변 와중이다.

한 해 전 고국에서는 3·1독립운동이 있었다. 놀란 일제는 연해주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했다. 독립운동 근거지를 궤멸시킬 의도였다. 역사는 4월 참변으로 기록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한촌도 피해가지 못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는 당시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기록물로 빼곡하다. 기록에 따르면 4, 5일 이틀 동안 이곳에서만 300여 명이 숨졌다.

신한촌(新韓村)은 해외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고려인 집단거주지 이상 의미를 갖는다. 개척리에서 쫓겨난 고려인들이 세웠다(1911년). 한때 1만여 명이 살았다. 이곳은 연해주 독립운동 중추였다. 최재형, 이상설, 이동휘, 신채호, 홍범도 등 내로라하는 명망가들이 활동했다. 1919년 세운 ‘대한국민의회’는 최초 망명 정부다. 그러나 1937년 이후 폐허가 됐다. 스탈린은 그해 고려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일제 스파이를 막는다는 이유다.

연해주 일대 고려인 17만 명이 대상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맨몸으로 화물차에 올랐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반세기가 걸렸다. 소련 연방 해체 이후 1993년 러시아 정부는 고려인 강제 이주가 반인륜적 범죄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는 기나긴 유랑이 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6700㎞ 떨어진 중앙아시아까지 40여일을 달렸다. 짐짝처럼 내던져진 곳에서 고려인들은 혹한을 견뎠다. 살아남기 위해 맨손으로 토굴을 파고 갈대를 엮었다.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1만5000여 명이 숨졌다.

쓰라린 유랑의 역사다. 오늘날 여행자들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로망이다. 하지만 82년 전 고려인들에게 시베리아 철도는 눈물과 고통이었다. 수년 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들렀다. 토굴과 움막을 봤다. 그리고 재래시장에서 과일과 야채를 파는 고려인 후손들을 만났다. 까레이스키라고 부르며 호기심을 나타내는 나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의 강을 건너온 이들만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눈빛은 “네가 긴 유랑과 고난의 역사를 아느냐”는 힐난으로 읽혔다.

그 무심한 눈빛을 이번 기행에서도 만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에서다. 고려인 3세 이 베체슬라브씨는 20년 동안 기념탑과 주변을 관리하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활동했던 땅을 지키고 있다. 올해 65세인 그는 혼수상태에 있다. 유승호 한인일보 발행인은 “병상에서 일어난다는 게 기적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남편을 대신해 지키고 있는 아내 얼굴 또한 무심했다. 그 침묵과 무표정이 못내 잊히질 않는다. 지금 신한촌은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울 스카야 2A’라는 거리 이름만 남아 지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토인비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우리가 100여 년 전 쓰라린 유랑을 기억하고,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되새김하며, 고려인 후손을 예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10년 나라가 통째로 망한 날, 수많은 조선 선비들은 목숨을 끊어 치욕을 대신했다. 매천 황현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경술국치 10일 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며 세상과 등졌다. 지금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정쟁으로 지새우는 대한민국 국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100여 년 전 연해주 독립운동사와 고려인 후손을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신한촌 기념탑/ 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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