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타임머신]머슴에게 무릎 꿇은 '교회민주화' 조덕삼과 조세형 前의원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9-08-19 10:54
# 노무현 서거 때 충격으로 눈감은 민주화정치인

2009년 6월1일 노무현 전대통령이 비극의 죽음을 맞았을 때, 충격으로 쓰러진 정치인이 있었다. 장례 때 봉하마을에 다녀온 뒤 뇌경색으로 입원했고 보름을 넘긴 뒤인 6월17일 그는 타계했다. 79세의 정치인 조세형은 이 땅의 파격적 정치 혁신이 참담한 종말을 맞는 상황을 보면서 슬픈 눈을 감았다.

조세형은 전북 김제 사람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언론 출신 정치인이다. 합동통신 정치부기자를 거쳐, 한국일보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창립대표를 맡기도 했다. 25년간 그는 '언론인 조세형'이었다.

1978년 총선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정치에 발을 딛었다. 평민당과 민주당 등 야당 중진의원으로 활약하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패배해 정계은퇴 위기에 몰렸다. 1998년 김대중정부가 출범했을 때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맡았고 그해 7월 광명을 보권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재기를 했다. 노무현정부 시절엔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 김제 갑부 조덕삼과 테이트 선교사의 대화

조세형은 전북 김제의 갑부 조덕삼(1867~1919)의 손자다. 그는 모악산 기슭에 있는 '기역(ㄱ)자 교회'라고 불리는 한옥예배당 금산교회(전북문화재 제136호)를 세운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1904년 봄날 테이트(최의덕, 1862~1929) 선교사는 말을 타고 복음 선교를 다니다 김제 용화마을에 들른다. 그는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는다.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에게 묻는다. "살기 좋다는 그대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오셨는지요?" 그러자 선교사는 "신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조덕삼은 유학자였기에 이 말이 무척 놀라웠다. 그는 사랑채를 내주면서 이곳에서도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권한다. 금산교회는 이렇게 출발했다.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를 뽑는 투표를 실시한다. 이 투표에는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후보에 오른다. 이자익(1882~1961)은 누구인가. 바로 조덕삼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었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사람으로 6세때 부모를 여의고 떠돌던 끝에 김제로 왔다. 조덕삼은 그를 불쌍히 여겨 머슴이자 마부로 일하게 했다.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던 이자익은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고 있었는데, 조덕삼은 그의 아들 조영호와 함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조덕삼 선생]

[이자익 목사]


# 머슴이 주인을 제치고 장로가 되었는데

그 머슴이 장로 직책의 경쟁자가 된 것이다. 투표 결과, 이자익이 조덕삼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그날 조덕삼은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자익 영수(교회직책)는 비록 저희 집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신앙은 저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를 장로로 뽑아주신데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장로가 된 이자익은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강단에서 설교를 했다. 그때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앉아 그의 설교를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이자익이 다시 머슴으로 주인을 깍듯이 섬겼다. 신분을 초월한 이런 기풍경이 금산교회를 유명하게 했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 3년 뒤 장로가 된 조덕삼은 교회를 지을 땅을 헌납한다. 이 건물에는 강단 뒤쪽에 목사가 출입하는 작고 낮은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이 문을 가리켜 "주께서 낮춤을 가르쳐주시는 겸손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자익은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한다. 그를 담임목사로 모신 사람이 조덕삼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교단에서 총회장을 세 차례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이 된다. 2012년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다. 이 행사에 조세형과 이규완이 참석했다. 조세형은 4선 국회의원이지만 금산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이규완은 이자익의 손자로 고분자화학박사이며 대전제일교회 장로다. 조덕삼-이자익의 아름다운 신앙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 조덕삼 손자와 이자익 손자의 만남

이규완은 조세형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참 잘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희들도 우리 할아버지도 안 계셨을지 모릅니다." 2009년 조세형의 타계에 당시 천정배의원의 추도사에는 이 사연이 들어 있었다. "조의원의 조부는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했던 분입니다. 위아래에 얽매이지 않는 민주적 가치가 집안DNA로 내려왔던 게 아닌가 합니다."

조세형의 부친 조영호는 조덕삼이 세운 민족학교 유광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학교에서 태극기를 그리도록 하고 3.1운동 때 태극기 시위를 함께 했다. 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활동을 했다. 이 나라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운 푯대를 세운 조덕삼과 식민지 시대 애국적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벌인 아들 조영호. 이 땅의 민주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언론과 정치 영역에서 분투했던 조세형. 삶의 많은 것들이 흩어지고 세상의 많은 것들이 뒤바뀌더라도, 끝까지 놓지 말고 바라봐야할 아름다운 진실들도 있는 법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와 컴패션의 따뜻한 동행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제3회 서민금융포럼
    김정래의 소원수리
    아주경제 사진공모전 당선작 발표 안내 2019년 8월 23일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