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칼럼] 역사적 사실, 드라마 흥미 위해 왜곡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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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윤봉길연구소 이사장
입력 2019-07-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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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윤봉길연구소 이사장]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정부는 물론 각종 언론 방송에서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며,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최근 절찬리에 방송되고 있는 MBC 특별기획 드라마 ‘이몽’도 그중 하나다. ‘이몽’은 일제 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의사 이영진과 비밀결사 의열단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박진감 있게 전개함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지난 6월 22일(토) 27~30화 방송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를 중심으로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 등이 언급되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날 방송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야채를 팔던 윤봉길 의사를 만나 김구 선생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때 윤봉길 의사는 ‘일왕 천장절 및 상해 점령전승 기념식’ 기사가 실린 신문을 김구 선생께 보여 주며, 상해의거 거사의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이후 이영진 의사와 김원봉 의열단장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를 돕기 위해 계획에 착수했다. 중국의 비밀결사단체인 청방의 보스 두월성에게 홍구공원 거사(상해의거)를 언급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두월성은 상해의거를 돕기 위해 홍구공원 행사의 입장권을 구해 주는 등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흥미 위해 역사적 중요 사실이 왜곡되면 안 돼
역사 드라마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매우 반길 일이다. 당시 일제의 간교함과 잔혹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죽음도 불사한 우리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은 우리 후손들에게 깊은 자긍심과 감명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혹여 드라마의 흥미를 위해서 사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쳐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틀리게 되면, 자라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교과서의 수정은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몽’에 드러난 상해의거의 큰 오류 하나를 예로 들자면, 윤봉길 의사는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적이 없다. 더구나 의열단장 김원봉은 상해의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결국 이는 작가가 꾸민 허구로, 이로 인해 드라마의 내용이 사실과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상치 않다.
차제에 상해의거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 보면 다음과 같다. 상해의거를 도모한 윤봉길 의사는 조국독립의 큰 뜻을 품고,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했다. 당시 임정은 겨우 이름만 유지하고 유명무실 힘을 발휘치 못해, 임정의 도움을 받고 싶은 윤 의사를 실망시켰다. 게다가 일제의 간교한 꾀로 발발한 만보산사건(1931. 7. 2)으로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이 거세 중국 상해에서의 거사는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혁명의 뜻을 일단 접은 후, 세계혁명사를 공부하려고 미국유학을 결심했다. 그 비용을 마련하려고 모자공장에 취업, 밤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던 차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이 발발, 세계 이목이 상해로 집중되고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깨닫고, 유학계획을 접고 혁명을 결심했다.
일단 윤봉길 의사는 모자공장을 그만두고, 일본인 거주지역 내에 있는 홍구시장에서 밀가루와 채소를 판매하며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며 정보 입수에 주력했다. 때마침 4월 24일 일본 교포신문인 상해일일신문에 ‘천장절 및 상해 점령 전승기념식 개최’ 정보를 입수한 윤봉길 의사는 당일 즉시 김구 선생을 찾아가 거사 의지를 밝히고 폭탄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상해의거에 드러난 단편적인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 ‘이몽’에 드러난 상해의거의 오류는 몇 가지 더 있다. 김구 선생과의 만남도 의열단장 김원봉의 소개로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윤 의사가 모자공장에 다닐 때, 이곳을 몇 번 찾아온 김구 선생과 시국문제를 토론하며 알고 있는 사이였다.
한편 남화연맹의 백정기 의사도 같은 날 거사하려고 준비했으나, 입장권을 마련해 준다는 중국인(왕아초·王亞樵)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거사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윤 의사도 입장권이 없었으나, 애초에 입장권의 유무에 미련을 갖지 않았던 윤봉길 의사는 유창한 일본말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대담하게 홍구공원 정문을 통과해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상해의거,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쾌거
당시 조선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세계지도에 일본과 한반도(조선)는 동색(같은 색)으로 칠해졌고,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한반도 지역(조선)을 일본의 고유영토로 승인받았다. 전후 조선이 독립하리라고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상해의거로 인해 임시정부가 부활, 이후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더욱이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크게 감동을 했다. 이후 장 총통은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끝내 독립 확약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는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조국 광복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의 흥미를 위해서 왜곡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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