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동농?… 그가 염두에 둔건 ‘조선의 이익과 앞날’ 뿐

류은혜 기자입력 : 2019-01-29 17:33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⑬ 대원군 살생부에 든 동농 개혁파·수구파? 日편·러편? 열강외교관도 ‘갸웃’ 왕을 지켰지만… ‘법’을 더 중시한 입헌주의자

갑오년 여름, 동농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품계명)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됐다. 공조(工曹)는 산림(山林)과 소택(沼澤)을 관리하고, 공장(工匠), 도자(陶磁), 야금(冶金) 및 건축과 수리를 관장하는 부서다. 일찍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보총사(電報總司)와 종목국(種牧局)의 설치를 건의했으며, 주일공사로서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한 바 있는 그에게는 썩 어울리는 임무였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아버지 김응균이 처음으로 제수받은 판서 자리도 공조판서였다. 벌열(閥閱)이 지배하는 조선에서도, 대를 이어 판서를 지낸다는 건 흔치 않은 경사(慶事)였다. 돌아가신 직후, 꿈에 나타나서 “모든 것은 수(數)가 있느니라”고 위로해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부친이 공조판서에 임명한다는 교지(敎旨)를 받은 게 당신 나이 예순둘의 일이었으니, 동농은 아버지보다 13년이나 빨리 정경(正卿)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그는 가문의 영광에 취해 있을 겨를이 없었다. 작금의 정세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다. 떨어져도 죽고, 내리지 못해도 죽는다. 갑오개혁은 간신히 이륙(離陸, take off)은 했으나, 연착륙(soft-landing)의 전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개혁의 우이(牛耳)를 쥐고 있는 건 일본이었고, 그 일본과 피아(彼我) 관계로 대치한 안팎의 크고 작은 힘들이 사방팔방에서 김홍집 내각을 조이고 있었다.
청나라는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밀렸다. 뤼순(旅順)은 하루만에 함락되었고,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상징인 북양수사(北洋水師) 기함(旗艦) 딩위안(定遠)은 일본 연합함대의 속사포(速射砲)에 쫓겨 힘 한번 못 쓰고 달아났다. 제독 딩루창(丁汝昌)은 자살하고, 함대는 항복했다. 리훙장은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랴오둥(遼東)과 타이완(臺灣)을 할양하며, 배상금 2억냥을 치르는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조석진, <군국기무소도(軍國機務所圖)>, 1894. 군국기무처 회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의원 명단에 김가진의 이름이 보인다.



◆대원군의 몽니
청일전쟁은 사대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안보정책인지 확인시켜 주었다. 조선은 일본을 모델로 삼아 자신의 두 발로 서야 한다는 동농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이 일을 추진할 동력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의 간섭과 민씨들의 방해를 제친다? 일본이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는 일단 천천히 생각하더라도, 유약하고 변덕스러운 고종은? 그리고 백성의 눈과 귀는?
동농이 주일공사 시절 김옥균과 접촉하며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대원군의 정계 복귀가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은 것 같다. 원래 대원군과 개화당은 불구대천(不俱戴天)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인정하지 않던 사이. 그런 두 세력이 손을 잡아야 할 만큼 조선의 정세는 다급했다.
동농과 김옥균은 각각 다른 채널을 통해 비밀리에 대원군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던 날, 동농이 고종에게 ‘대원군을 쓰시라’고 건의한 까닭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다. 대원군은 민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적(政敵)이고, 고종과 달리 돌파력이 있으며, 백성들의 신망도 아직은 높은 편이었다.
갑오개혁은 동농 등 고종의 측근인 ‘소장(小壯)’ 개화파와 대원군의 연립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어차피 둘 다 일본의 등에 업힌 상황. 연립이 흔들리면, 호랑이 등은 그 즉시 호구(虎口)가 된다. 자신의 명망을 과신했든지, 아니면 노욕에 눈이 멀었든지, 대원군은 이 연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력(自力)으로 밀어붙이는 개혁도 아닌 터에, 대원군의 몽니는 정세를 시계(視界) 제로의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넣었다.
8월 말부터, 대원군은 군국기무처가 통과시킨 개혁안에 대한 재가를 거부했다. 그러자, 소장 개혁파들은 국왕의 재가를 받아 개혁안을 통과․시행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고종으로서야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겠지만, 문제는 이 틈을 타고 민씨들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는 거다. 핏대가 오른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장손(長孫) 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올리겠다고 나섰다.


◆농민군·청나라 끌어들인 대원군
대원군은 농민군에게 손을 뻗었다. 일본과 민씨를 몰아내자! 삼례(參禮)에서 열린 농민군과 동학도의 수뇌부 회동에 대원군의 밀사 박완남이 참석한 것을 보고, 전봉준(全琫準)은 놀랐다(신복룡,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 p130). 어서 싸우자는 김개남(金開南)의 비분강개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손병희(孫秉熙)가 이끄는 북접(北接)과 합세한 농민군은 10월 23일 공주(公州) 근교 이인(利仁)에서 관군과 맞붙었다.
같은 날, 도성에서는 소장 개혁파의 중심인물인 법무협판 김학우(金鶴羽)가 암살당했다. 대원군이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원군의 ‘살생부’에는 동농도 들어있었다. 한 해 뒤, 이준용 역모 사건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기사를 보자.

“피고 이준용은 지난해 6, 7월경에 동학당(東學黨)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인심이 흉흉한 때를 타서 피고 박준양과 이태용의 모의에 찬동하여 한기석, 김국선과 비밀 모의를 하고 즉시 동학당에 모의를 통고하여 경성(京城)을 습격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소동을 피우고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가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피해갈 것이니 그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部下) 통위영(統衛營)의 군대들로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를 시해(弑害)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수하(手下)의 흉악한 무리를 지휘하여 정부의 당국자들 중에서 김홍집(金弘集), 조희연(趙羲淵), 김가진(金嘉鎭), 김학우(金鶴羽), 안경수(安駉壽), 유길준(兪吉濬), 이윤용(李允用) 등을 살해하여 정부를 전복하며 왕위를 찬탈하려고 꾀하였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4월 19일 첫 번째 기사)

대원군은 평양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와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 계획은 곧바로 일본군에게 탐지되었다. 동농은 참담했다. 청나라는 일본을 못 이긴다. 하물며, 농민군더러 감당하라니. 그는 전봉준들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었고, 그해 봄의 봉기에 대해서도 전혀 동정하지 않았으나, 이 사태가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게도 구럭도 다 잃는다. 어찌 이리도 시국을 못 읽는단 말인가. 연립은 깨어졌다.


◆청나라가 가고, 러시아가 오고
청일전쟁은 썩을 대로 썩은 청나라의 민낯을 낱낱이 폭로했다. 청나라와 일본에 앞다퉈 군함과 대포를 팔면서 이문을 챙기고, 어부지리를 노리던 서구(西歐) 열강은 극동정책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힘의 균형에 균열이 발생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틈을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바닷길을 여는 게 숙원이었던 러시아는 그 공백을 자신이 차지하려 들었다.
러시아의 야욕에 독일과 프랑스가 동참했다. 독일은 중국 시장에 진입할 교두보가 목말랐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산업화에 막대한 액수의 차관을 제공한 관계였다. 러시아는 일본을 얼렀다. 이번에 삼킨 전리품을 토해내라. 싫다면 전쟁이다. 일본은 전율했다.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은 사태를 관망했다. 러시아의 압력에 일본이 얼마만큼 견디는지 재보고 싶었을 게다. 미국은 아직 하와이(1897)와 필리핀(1898)을 손에 넣기 전이었다.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은 개혁의 전도(前途)를 더 어둡게 만들었다. 청나라가 물러가고, 일본의 기운이 한풀 꺾인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러시아가 왔다. 이 나라는 전통적으로 영토 욕심이 많은 나라다. 조선을 바닷길로 취하려는 러시아와 조선을 생명선으로 삼으려는 일본이 싸운다면, 누가 승자가 되든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제는 정말 남은 시간이 거의 없었다.
동농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으나, 근왕(勤王)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거꾸로, 대원군의 폐위 시도에 맞서 고종을 보위하면서도, 전제군주제의 부활을 경계했다. 박영효의 고종암살음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갑오개혁 추진과정에서 그와 노선을 함께 했던 동농도 곤경에 빠졌다.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임에도, 고종이 어전회의에서 멋대로 칙임관(勅任官, 정1품부터 종2품까지 최고직위의 관리)을 임명하자, “칙령의 제정과 칙임관의 임면 등에 관한 수속 절차를 정하고 이것을 바꾸지 못하도록 상헌(常憲)으로 정하여 국왕의 전제를 예방” 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그래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외교관들은 동농이 개혁 편인지 수구 편인지 미심쩍어했다. 삼국간섭 뒤에는, 일본 편인지 러시아 편인지 의심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동농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평판은, 초지일관 조선의 앞날과 이익을 지키려 했던 동농의 한결같은 의지의 투사(透寫)였을 뿐이다. 갑오년의 함성 속에서, 그는 농민군의 손을 부여잡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군의 이름으로 부활한 농민 형제들과 만났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 옛날의 개화당이 김가진 그 사람 한 명이었던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나, 근대로 가는 문을 두드린 민족의 에너지가 끝내 하나가 되리라는 역사의 계시(啓示)다.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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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간섭을 풍자한 당시 유럽 신문 만평.



청일전쟁 승리에 도취됐던 일본, 러·佛·獨 압박에 랴오둥반도 반환
-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서 인정된 일본의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영유(領有)에 반대하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공동간섭.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국과의 사이에 강화조약을 조인․비준(批准)하였다. 그런데 조약 내용을 본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은 4월 23일 이 조약에서 일본에 할양하도록 되어 있는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강력히 권고하였다.
주일(駐日) 러시아공사가 일본의 외무성 차관 하야시 다다스(林董)에게 수교한 각서에 의하면, 간섭의 취지는 “랴오둥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단순히 청국의 수도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까지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결과가 되어, 이는 장래 극동의 영구적인 평화에 대한 장애를 주는 것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 정부에 권고하노니 랴오둥반도를 확연히 영유하는 것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되어 있었으며, 프랑스․독일공사의 각서도 이와 대동소이하였다. 러시아는 더욱 적극성을 띠어 군함을 고베에 파견하여 시위행동에까지 나섰다.
당시의 일본은 3국 열강을 상대로 하여 싸울 만한 전력(戰力)이 없었기 때문에 내각회의 결과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영국과의 사이에 회의를 개최하고 이 권고를 처리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외상(外相)인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는 장래 다른 사건으로도 열국의 간섭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 의견에 반대하고 결국 시모노세키조약은 그대로 체결하고, 랴오둥반도 반환문제는 별개로 취급할 것을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 후 무쓰는 영국․미국 등 간섭에 참가하지 않았던 열국에 호소하여 사태를 회유하려 획책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마침내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고, 5월 5일 이 사실을 3국에 통고하였다. 반환조약은 11월 8일 청․일 양국 간에서 체결되고 그 대가로 청국으로부터 4500만원의 보상금이 지불되었다.
이 반환은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국위고양(國威高揚)에 취해 있던 일본국민들의 국내 여론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한편 3국간섭은 유럽 열강에도 청국을 분할하는 단서를 열어주어, 1898년 3월에는 독일군이 자오저우만(膠州灣)에 상륙하였고, 프랑스․영국 등 열국도 앞을 다투어 군대를 파견하여 조차지(租借地)를 요구하였으며, 러시아는 만주에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랴오둥반도를 조차하였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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