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국어에 능통했던, 유일한 양반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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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혜 기자
입력 2019-01-1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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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③북학(北學)의 그늘에서

북학(北學)의 그늘에서

가진은 사다리에서 떨어진 기분이었다. 실수해서 헛발을 짚은 것도 아니다. 잘 오르는 중인데, 넌 이 줄에 설 자격이 없다는 선고를 받은 거다. 관복을 입는다는 게, 아니 관복을 입지 못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양반의 자손인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더 막막했다. 출세의 사다리는 내 차지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아니라니.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이런 결말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배운 덕에 더 비참했다. 공맹(孔孟)은, 세상은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로 나뉜다고 가르쳤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아름다우나, 그것은 오직 부리는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알면서 못 먹는 금단의 고통에 평생 몸부림치느니, 차라리 고기 맛을 모르고 사는 게 나았을 것을. 아버지가 야속하고,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이쯤 되면 색주가로 빠질 법도 한데, 가진은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재물에 무심했다. 밥상에는 나물과 새우젓이 고작이었다. 술집에 드나들 돈도 없었거니와, 신분이야 어떻든 글을 배운 선비라는 자존심이 일탈을 막았다. 김 판서만 서얼 아들을 뒀나. 가진은 처지가 비슷한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지으며, 자신의 몸에 찍힌 낙인(烙印)을 애써 잊으려 했다.
그러나 국법(國法)은 청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파문(波紋)을 연달아 일으켰다. 시회(詩會)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 낯선 소년이 그를 맞았다. 양자(養子) 화진(華鎭)이었다. 아버님께 이미 말씀은 들었지만, 막상 대하는 순간 무릎에 힘이 쭉 빠졌다. 그래, 나는 오늘부터 이 집의 아들이되 아들이 아닌 게야…. 북받치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가진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제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농이 쓴 비원 애련정 현판.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길은 어디에

어디로 가야 하나. 가진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과거 급제가 목표였을 때, 답은 간단했다. 경전을 외우고, 문장을 기른다. 급제를 자신했기에, 다음 순서는 틀에 박힌 듯 사다리를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이제는 아니다. 이팔(二八) 전에, <고문진보(古文眞寶)>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암송하는 수준에 도달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조선에서는 가전(家傳)의 학문으로 일가(一家)를 이루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라의 학통(學統)을 삼분(三分)한 퇴계(退溪)․남명(南冥)․율곡(栗谷) 집안이 그랬고, 예학(禮學)의 맥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로 이어졌다. 후손이 용렬했는지, 입신양명이 먼저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사화(士禍) 때문이었는지, 모든 게 대물림인 사회에서 정작 학문이 가업(家業)으로 계승․발전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배움의 첫 장은 당색(黨色)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동농이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확실치 않다. <동농 김가진전>의 저자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동농이 가숙(家塾)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들어, 과거 위주의 공부에 전념했으되 북학파(北學派)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한다. 북학은 안동 김씨가 속한 노론 계열의 신사조(新思潮)였다.
청나라의 진보한 문물(文物)을 받아들이자던 북학. 그것은 개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날개 꺾인 청년 가진에게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의 끈이었다. 청나라에서는 서얼이라도 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뜻을 펼칠 수 있다지?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 직전인 청나라의 속사정을 알 길 없는 가진으로서는, “선(先) 이용후생(利用厚生) 후(後) 정덕(正德)”을 주장하는 북학의 세계관에서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 외국어를 배우자

가진은 지도를 펼쳤다. 조선과 청(淸)과 왜(倭)가 눈에 들어왔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 1851~1864)을 외국 군대의 도움으로 겨우 수습한 청나라는 그렇다 치고, 왜의 정세는 어떠한가. 그 나라는 흑선(黑船)이 도래(渡來, 1853)한 이후, 하급무사들이 명치유신(明治維新, 1867)을 결행해 나라를 바꾸는 중이란다.
거기에 위아래가 꽉 막힌 조선의 문제를 풀 실마리가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서구(西歐)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북학이 본뜨려던 청나라 신문물의 원조임을, 가진은 모르지 않았다. 그걸 일본은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주위에 물어봤자,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직접 들어보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가진은 일본말을 배우기로 했다. 수소문해서 역관(譯官)을 찾으니, 영문을 모르는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김 판서 자제가 일본어를 배워? 내색하지 않고, 가르침을 청했다. 일본어는 생각보다 쉬웠다. 어순도 똑같고, 문장은 한자(漢字)투성이다. 몇 안 되는 일본인들과 접촉하면서, 회화(會話) 연습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진의 일본어 실력은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청나라 말도 배웠다. 한문(漢文)이야 내 전공 아닌가. 그런데 글과 말은 달랐다. 사성(四聲)이 영 입에 붙지 않았다. 조금씩 말문이 트이자, 비로소 한문 실력이 보탬이 됐다. 외국어에 자신이 붙자, 가진은 영어에 도전했고 의사소통에 성공했다. 물론, 한두 해에 된 일은 아니다. 개항 전야(前夜), 양반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 중에서 조선의 이익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3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물은 동농, 그 한 사람뿐이었다.

 

조대비는 동농이 처음 알현한 왕실의 어른이었다. 사진은 조대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를 그린 조대비사순칭경진하도(趙大妃四旬稱慶陳賀圖) 병풍이다.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조대비(趙大妃)의 눈에 들다

벨테브레이(J. Weltevree, 조선명 박연, 1627)와 하멜(H. Hamel, 1653)을 싣고 온 이양선(異樣船)이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지 200년. 실로 천하태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선은 밖으로부터 밀려올 충격에 대비하지 않았다. 고종(高宗)이 등극(1863)하고 세도도 옛말이 되었건만, 왕조는 여전히 잠자고 있었다. 이번에 온 배는 군함이었다.
병인년(丙寅年, 고종3․1886) 정월, 조정은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했다. 그 가운데에는 9명의 프랑스인 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국 주재 법국(法國) 대리공사 벨로네(H.D. Bellonett)는 복수를 다짐하며, 영국(英國)도 덕국(德國, 독일)도 열지 못한 조선의 문을 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9월, 프랑스 극동함대 소속 군함 3척이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楊花津, 현재 양화대교가 놓인 지점)까지 올라왔다. 도성은 난리가 났다.
조정은 팔도(八道) 관아(官衙)에 방(榜)을 붙여 의군(義軍)을 불러모았다. 가진은 주저 없이 달려나갔다. 형 영진(永鎭)은 일찌감치 무과(武科)로 방향을 돌려 무관으로 출사(出仕)했지만, 동생 가진은 칼자루 잡아본 적이 없던 몸이었다. 의군은 섭정(攝政) 조대비(趙大妃) 앞에 도열(堵列)했다. 고종을 양자로 맞아들여 왕위 계승의 뒷배를 보아준 조대비의 눈이 한 젊은이의 얼굴에 꽂혔다.
“너는 누구냐?”
“판서 김응균의 서자, 가진이라 하옵니다.”
“애석하구나. 네가 능히 나랏일을 말해보겠느냐?”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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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北學)

조선 후기, 청나라의 학술·문물·기술을 받아들여 민생(民生)을 도모하자는 경세론(經世論)을 편 학파. 조선 후기 개혁 사상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으나, 조선을 쇄국의 덫에 옭아맨 성리학의 세계관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북학(北學)이란 이름 자체가 <맹자>에서 따온 것으로, 남쪽 야만국 초(楚)나라 사람 진량(陳良)이 북쪽 문명국 주(周)나라와 노(魯)나라의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에 감화되어 나라를 덕(德)으로 이끌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경제지학(經濟之學)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한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열하일기(熱河日記)>로 널리 알려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북학의(北學議)>를 쓴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박지원은 ‘이용후생(先利用厚生)이 먼저이고 정덕(正德)은 다음’이라고 설파해 서얼 허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으며, 박제가는 정조에게 올린 <북학의>를 통해 대외교역과 물산장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북학파의 사상은 조선 말기 개화파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박제가 자신이 서얼 출신이었다는 점, 동농의 지우(知友)였던 완서(翫西) 이조연(李祖淵, 1843~1884)이 연암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제자였다는 점에서, 북학의 그늘에서 자란 동농이 개화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달리 병인란(丙寅亂)이라고도 한다. 고종 3년(1886), 9월과 10월 두 번에 걸쳐 프랑스 극동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사건이다. 천주교도 학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며, 프랑스는 함대를 동원해 조선의 개항을 꾀했다. 1차 침공 때는 교전이 없었으나, 2차 침공 때는 프랑스함대가 강화도 갑곶(甲串)에 상륙하고 강화부를 점령, 조선군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육전대(陸戰隊)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프랑스군은 약 1달 동안 강화성을 점거했으며,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른 뒤 약탈한 재물과 서적을 함대에 싣고 퇴각했다. 병인양요는 당시 실권자 대원군에게 양이(洋夷)를 물리쳤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 조선이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2011년, 프랑스가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한 외규장각(外奎章閣) 왕실 의궤(儀軌) 296권은 이때 약탈당한 우리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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