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칼럼]김정은 핵열쇠, '카다피 트라우마' 뒤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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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8-09-2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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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북정상회담 3일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가 백두산 장군봉을 방문한 후 백두산 천지로 이동하기 위해 케이블카로 향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북한도 리비아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의 고통을 막을 수 있습니다.” 2003년 12월 19일 무아마르 카다피는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리비아는 핵프로그램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전격적으로 발표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허용한다. 이후 미국은 리비아와 국교를 정상화하고 유럽국가들은 리비아 경제제재를 푼다. 미국은 리비아의 핵무기 제조 서류와 장비 25t을 미 테네시주 오크리지 연구소로 옮겼다.

카다피가 핵 포기를 수용한 까닭은 뭘까? 그해 10월 원심분리기를 싣고 리비아로 가던 배가 나포되어 핵개발이 제대로 들통이 났고, 미국은 이 나라에 핵을 포기하면 파격적인 정치적·경제적 혜택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부시는 아랍과 ‘테러전쟁’을 펼치고 있던 터라, 리비아의 협력이 아쉬울 때였다.

2011년 10월 20일 아랍을 휩쓴 재스민혁명의 와중에, 카다피는 나토(NATO)의 지원을 받는 리비아반군에게 생포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 과연 리비아가 핵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전문가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미국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적대국의 핵을 저지하려고 하는가. 미국이 군사 개입의 필요성을 느낄 때 그 대상국의 핵 보유는 전략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후 두 달이 채 못 되어 북한에선 김정일이 사망하고 그해 12월 29일에 김정은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됨으로써 권력을 승계했다. 집권 시작 무렵 그가 목격했던 ‘카다피의 죽음’. 그에게 입력된 메시지는 ‘핵 포기는 죽음이다’가 아니었을까.

송영길 의원(민주당)이 지난 14일 한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2004년에 이라크를 다녀 왔습니다. 그때 미국이 전쟁을 한 거 아닙니까? IAEA 보고서를 보면 후세인이 스커드미사일도 해체하고 자기 왕궁 지하실까지 전부 다 사찰을 허용했어요. IAEA가 다 뒤져보고 위치파악한 다음에 바로 미국이 공격해서 그 지점마다 폭격한 거 아닙니까? 북한 입장에서, 핵시설 위치를 다 신고해요? 무서운 거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송 의원이 작년에 들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는데 카다피와 후세인 얘기를 하더군요. 그는 풀을 뜯어먹더라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풀을 뜯어먹더라도’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다. 1974년 5월 18일 인도가 핵실험을 한 뒤 핵개발을 개시했던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가 한 말 아닌가. “인도가 핵무기를 갖게 되면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입니다.” 푸틴이 염두에 둔 것은 아마도 김정은이 파키스탄 식의 핵보유국으로 진입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지난 4일 게리 세이모어(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가 방송에 나와서 한 얘기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북한의 핵무기 제거는 불가능하고, 이를 제한하는 것만이 현실적인 목표로 가능할 것입니다. 핵 신고를 제안하는 일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이쯤에서 그제 발표한 9·19 평양공동선언을 살펴보자. 가장 부정적인 대북관(對北觀)을 지녔다고 할 만한 신문이 지적한 대로, 비핵화에 관한 남북 정상의 합의는 진전이 없었다. 동창리 핵시설 폐기는 북·미회담 합의의 재탕, 영변 핵시설 영구적 폐기는 이미 농축우라늄을 지하로 빼낸 상황에서 ‘폐기물 수거’라는 지적에 똑똑히 반박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신고를 요구하고 있는 북한 보유 수십기의 핵탄두와 핵물질, 고농축 우라늄 지하 농축시설은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많은 언론이 비판하고 있지만, 미국이 요구한 내용을 남북회담에서 내놓을 외교적 바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양 정상이 사실상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반도 평화의 원론적 천명뿐이다. 그리고 김정은은 “한반도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립서비스 이상의 천명을 한 것이고.

김정은은 집권 이후 핵개발과 관련해 세 가지에 주력했다. 카다피와 후세인의 핵무장 실패사례를 분석한 노르웨이 학자 멀프리 크라우트헤그함메르의 진단이다.

“첫째, 김정은은 지속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집중했습니다. 협상에 눈을 돌리지 않았죠. 둘째, 과학자를 측근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핵 2인조 리홍섭·홍승무, 미사일 4인방 김정식·리병철·장창하·천일호 등 신세대 과학자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있어요. 셋째, 북한은 핵과 관련한 자체 기술력을 집요하게 축적했죠. 1960년대부터 영변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해 운영했고, 러시아와 동유럽·중앙아시아의 과학기술을 암시장을 통해 사들여 자체 기술 개발에 활용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트럼프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듣겠는가. 지난 4월 29일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무슨 말을 했나. “우리는 2003년과 2004년의 리비아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게 비핵화의 진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핵무기를 오크리지로 가져가 직접 폐기하겠습니다.” 오크리지? 리비아의 핵무기를 실어갔던 곳이다. 김정은은 리비아 비핵화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지니고 있다.

그제 김정은 발언 중에 들어 있는 ‘핵위협도 없는’이란 말을 들여다보라. 핵무기 국가인 미국이 북한이나 집권자인 자신에 대해 군사적 선택을 할 때조차도 ‘위협’이 없는 협상을 원하고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북·미 협상의 지지부진을 비판하기는 쉽다. 트럼프의 뇌리에 있는 ‘북핵 무력화(無力化)’는 경제제재에 손든 항복에 가깝다. 머리에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독재자를 본 그가 죽음을 각오한 카드를 꺼내겠는가. 이 시점에서 섣부른 비판이나 개탄보다 더 필요한 것은, 북한 권력자가 핵을 포기하고도 안전하게 스스로가 원하는 북한의 번영과 국제사회의 건전한 진입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그에게 심어주는 일이 아닐까. 그가 원하는 파키스탄식 해법과 미국의 리비아식 해법 간의 엄청난 간극을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 정부로서도 현실적인 고민을 할 때가 되었다. 김정은이 북한을 부흥시키고 싶은 의욕은 상당한 듯하다. 다만 핵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고심하는 것은 '카다피 트라우마' 때문이다.

남캘리포니아대 데이비드 강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김정은은 허풍쟁이가 아닌 북한주식회사 CEO다. 국제제재를 받아가면서도 북한경제를 성장시키고 기업문화를 재편성한 인물이다. 얕봐서는 안 된다.”(작년 8월 포린어페어스 기고)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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