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지방 黨·政·軍·會 4권 통수권자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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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선 기자
입력 2018-06-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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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⑩

  • 저장성 1인자…지속가능한 성장 통한 부자 省 발돋움

필자의 애독서는 '백범일지'다. 그중에서도 가슴에 가장 절실히 다가오는 부분은 아래 대목이다.

"이렇게 ‘강남’의 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나라보다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서구문명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고래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당·송·원·명·청 시대에 끊임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오고 궂은 것만 들어왔는고. 의관·문물·실준중화(實遵中華)라는 것이 조선 500년의 당책이라 하였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길 좋은 것 뿐이요, 이용후생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러고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사상뿐이 아니냐. 주자 이상으로 주자학을 발달시킨 결과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의뢰심뿐이다.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잊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백범 김구 주석이 이처럼 한편으로 우리의 탁상공론을 한탄하며 한편으로 중국의 이용후생을 부러워하던 ‘강남’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우리나라(남한)와 가장 닮은 저장(浙江)성 일대다.

약 10만㎢ 면적과 4500만명 인구, 산악과 평야의 7대 3의 구성비, 바다에 2000여개 섬을 보유한 저장성은 남한과 면적, 인구, 산과 평야의 구성비 등이 흡사하다. 저장성에서 제일 큰 강의 이름은 ‘돈으로 둑을 쌓은 강’으로 풀이되는 ‘첸탕강(钱塘江,길이 589㎞)’이다. 우리나라의 한강(길이:514㎞)과 저장성의 첸탕강은 각각 1개 국가와 1개 국가내 특정 행정구역을 대표하는 강이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두 강의 길이와 지정학적 위치와 인문사회과학적 의미 등 유사한 부분이 많다.

예나 지금이나 저장성은 중국의 손꼽는 부자 성이다. 저장성 재벌이자 과거 남부 중국 최고 갑부 쑹야오루(宋耀如)이 대표적이다. 알려진 대로 쑹야오루의 세 딸 중 맏딸 아이링(譪齡)은 북부중국의 최고 갑부 쿵샹시(孔祥熙)의 부인, 둘째 딸 칭링(慶齡)은 중국 국부 쑨원의 부인으로 후일 중국 국가부주석 역임, 막내딸 메이링(美齡)은 장제스의 부인이다. 지금도 저장성은 중국 부호들의 집거지다. 알리바바 총재 마윈(馬雲)을 비롯해 중국 100대 민영기업가 중 19명(2017년 말 현재)이 모두 돈으로 둑을 쌓은 첸탕강이 흐르는 저장성 출신이다.

이러한 저장의 부윤(富潤)은 뭐니 뭐니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상인 서열 1위인 저장상인 덕분이다. 창조와 해방, 개혁과 개방, 실사구시(實事求是) 등의 상업정신을 가진 저장상인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행동이 민첩하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도 겸비한 사람들로, 그야말로 경영에 능수능란하다. 눈썰미가 좋아 돈 될 만한 장삿거리를 잘 찾아내고, 일단 기회를 잡으면 기막힌 상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중국 전역에 정평이 나 있다. 지금도 저장상인의 고급인맥, 높은 저축률과 풍부한 자금원동력은 저장성 경제의 동력이 되고 있다.

◆시진핑 정치 생애의 비약 시점은?

생애란 느리고 멈추고 빠르고 비약하는 삶의 운동이다. 14억 중국인 최고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의 정치 생애의 비약 시점은 언제일까?

2007년 11월 22일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1중전회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중앙 정치무대에선 무명인사나 다름없던 시진핑이 차기 최고지도자(서열 6위)로 등극했던 것이다.

당시 자타 공인의 차기 총서기로 기대되던 리커창(李克强) 현 총리는 서열 7위에 불과했다. 중국 공산당 고위직 인사관행상 정치국 상무위원(총리급 이상)은 바로 아래 단계인 정치국원(부총리급 이상)에서 충원돼 왔다. 그런데 시진핑처럼 일개 중앙위원(장관급 이상)이 정치국원을 단숨에 건너뛰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점프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흔히들 사람들은 시진핑의 정치 생애의 비약 시점을 그가 차기 총서기로 점프한 2007년 11월을 꼽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시진핑의 비약 시점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의 비약을 알게 된 시점이다.

시진핑 정치 생애의 비약은 2002년 10월에 시작됐다. 푸젠(福建)성 성장이던 시진핑이 그의 나이 만 49세이던 2002년 10월 중국 경제의 핵심지역인 저장성 당위원회 부서기겸 대리성장 겸 난징(南京)군구 국방동원위원회 부주임으로 영전했다.

특히 난징 군구는 장쑤, 저장, 안후이, 장시, 푸젠, 상하이 등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화동지역 5개성, 1직할시를 관할하며 정예 제1집단군 및 12군, 31군이 주둔중인 중국 7대 군구 중의 하나다. 신사복을 입은 문민 서기나 성장이 대군구의 군수뇌직을 겸하는 경우는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대 파격이다.
그 뒤 채 한 달도 못되어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 성장, 저장성 군구 당위 제1서기로 승진했다.
 

중국의 7대군구도[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후진타오(胡錦濤) 시대가 개막한 제16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폐막 직후의 일이었다. 이듬해 3월에는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성 의회 의장격)까지 겸했다.

우리나라에 견주어 말하자면 도지사 겸 집권당 도당위원장 겸 도의회의장 겸 도지역 군사령관직을 한
사람이 도맡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 역시 지난 40년간 중국에서 성(省)의 당·정, 성 인민대표회의와 성 단위 군부 1인자를 한 몸에 겸한 자는 시진핑이 유일하다.

여기에는 시진핑의 직속상사였던 쑹더푸(宋德福, 1946-2007) 푸젠성 당서기의 공이 컸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직계인 쑹더푸는 2000년 12월 푸젠성 서기로 부임했다. 푸젠성 성장 시절 시진핑은 자신의 인사권을 쥔 쑹더푸 서기의 눈에 들도록 최선을 다했다. 항상 낮은 자세로 공적은 쑹더푸에게, 과오는 자신에게 돌렸다. 숭터푸는 시진핑의 탁월한 업무 추진능력과 부패척결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 높은 청렴성을 후진타오 등 제4세대 핵심에게 보고했다.

◆저장성을 ‘차이나 복지’로 만들었다고?

이처럼 시진핑이 중국 경제 성장의 주축인 저장성의 당·정·군부와 인대(人代)라는 4권을 통수한 위치에 오른 것은 5년 후 있을 중앙의 최고권력자 자리 경쟁에 이미 한발짝 앞선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광둥·저장·장쑤성 등 흥성한 연해 성들에 비해 다소 한갓진 푸젠성 한 군데서만 17년 세월을 보낸 그의 단조로운 지방 당·정·군 지도자 경력도 폭을 넓힐 수 있게 됐다.

시진핑은 저장성에 부임한 뒤 9개월 만에 관내 90개 현중 69곳을 현지 시찰했다. 시진핑은 저장성 민영기업의 육성을 이어갔다. 부임 3년째인 2005년 저장성의 직원수 8인 이상의 민영기업수는 50만개에 이르렀다. 중국 전체 민영기업의 ‘매출액 베스트 500’에 저장성 민영기업이 40%에 육박하는 183개가 진입했다. 직원수 8인 미만의 영세기업과 식당·잡화점·구멍가게 등을 운영하는 개체공상호(영세자영업자)는 260만개에 달했다. 민영기업과 개체공상호의 총 매출액이 저장성 총생산에서 70%를 차지했다. 그가 부임하던 2002년 말 당시 광둥, 장쑤에 이어 전국 3위였던 저장성 경제를 부임 5년째 2006년 말에는 전국 1위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갈수록 달콤하다 못해 느끼해지는, “시진핑이 성장과 당서기를 4년 반(2002.10-2007.3) 맡은 덕분에 저장성이 하루아침에 ‘벼락 부자성’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차이나 복지(福地)’가 됐다” 는 식의 중국 관방학들의 아부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저장성 성도 항저우를 휘감고 흐르는 첸탕강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은 첸탕강이 흐르는 저장성을 '돈의 홍수'로 넘쳐나게 하지도 않고 ‘돈의 가뭄’으로 메마르지도 않게 ’돈의 치수(治水)‘를 유효 적절히 관리했을 뿐이다. 빈곤의 어둠에 혼곤히 젖어 있던 저장성을 별안간 윤기 자르르 흐르게 만든 게 아니라 가멸찬 저장성을 더욱더 가멸차게 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시진핑은 저장성을 지속성장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과의 교류

[출처: 한중친선협회 홈페이지 ]


우리나라에서 시진핑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인사는 한국 최고의 중국통,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전 체육부장관, 통일원장관)일 것이다. 그가 2012년 펴낸 저서 '이세기의 중국관계 20년' 143-145쪽에 시진핑 당시 저장성 서기와의 만남이 적혀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중문으로 번역됐으며, 시진핑 주석도 이 책을 직접 읽고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주석 리샤오린(李小林)을 통해 이세기 회장에게 감사의 서신을 보내왔다. 리샤오린은 전 국가주석 리센넨의 막내 딸이자 시진핑의 오랜 동갑 친구다.  소중한 자료이니 여기에 짧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시진핑을 만난 것은 2005년 4월 그가 저장성 당위서기로 있을 때다. 나는 한·중 경제협력 관련 강연회에 참석했을 때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서는 닝보(寧波)에서 개최 중인 소비품박람회에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상당한 시간 동안 한·중 경협 및 한반도 문제 등과 관련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헤이지면서 그가 “7월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라고 해서 “나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 꼭 한잔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해 7월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나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정치권 인사들과 함께 환영모임을 가졌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환담 중에 내가 “ 언제 귀국하십니까”라고 묻자 그 또한 “내일 제주도에 갔다 모래 귀국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제주도에 가면 꼭 서귀포에 있는 서복공원을 가보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놀라며 “제주도에 서복공원이 있습니까?” 꼭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서복공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자 그는 관심을 표명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동행해 서복공원을 안내하기로 했다.

다음날 제주도 서귀포의 서복공원을 둘러 본 시진핑은 감탄하면서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그의 관할지역인 저장성의 닝보는 서복이 두 번째 동도한 출항지라서 그는 서복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또 하나 시진핑을 감탄케 한 것은 감귤이었다. 서복공원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과정에서 전시관 벽에 제주 감귤에 대한 설명문이 있었다. 거기에는 제주 감귤이 원래 중국 저장 원저우(溫州)에서 온 감귤이라고 써 있었다. 이를 본 그는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제주도의 서복과 감귤은 중국에서 온 것이었다. 특히 원저우는 시진핑이 관할하는 행정구역 내에 있는 ‘원저우 상인’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원저우 상인들은 중국 전역뿐만 아니라 연해주, 심지어 북한까지 진출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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