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민규동 감독 "'허스토리' 역사, 엄마에서 딸 세대로…희망의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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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희 기자
입력 2018-06-2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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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를 연출한 민규동 감독[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부끄러워서…. 그 부채감으로 영화 ‘허스토리’가 시작된 거예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가슴 속에 돌덩이 하나를 올려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왔던 민규동(48) 감독은 10년 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 이야기를 “누가 보겠느냐”는 날카로운 지적에 번번이 좌절하고 무너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부끄러워서” 그는 또 한 번 용기를 내기에 이르렀다.

지난 27일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오직 본인들만의 노력으로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다. 당시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뤄냈음에도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재판’ 실화를 소재한 작품.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내 아내의 모든 것’, ‘서양골동양과자점’, ‘간신’ 등으로 관객들에게 친숙한 민규동 감독의 신작이다. 최근 아주경제는 감독 데뷔 20주년을 맞은 민규동 감독과 만나 ‘허스토리’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만나 인터뷰를 가진 민규동 감독의 일문일답이다

영화 '허스토리'의 연출을 맡은 민규동 감독[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영화 ‘허스토리’가 민규동 감독의 데뷔 20주년 작이 되었다
- 장편영화를 만든 지 20년째가 되었다. 제 첫 단편영화가 ‘허스토리’였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레즈비언 여고생의 커밍아웃을 다룬 영화였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 그들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역사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제목을 선택했었는데 이 제목이 가장 부합하는 이야기로 새로운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에도 질문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재판의 기록들을 들려주는 순간, 그녀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기억해야 할 역사적 모티브가 되는 지점이라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영화를 준비한 건 10년 전쯤이라고 들었다
- 그렇다. 10년 전에 처음 준비했다. 당시에는 ‘누기 이런 영화를 보겠냐’고 해서 포기했다가 3년 전부터 다듬고 완성해냈다. 그리고 변주로 3편 정도 작업을 한 뒤, 재작년 관부재판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정숙 캐릭터의 모델이 된 현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부산 협의회 김문숙 회장을 만나 뵙고 부산 여성 특유의 카리스마에 반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됐다. 2년 정도 된 셈이다.

김문숙 회장을 만나며 영화의 방향성이 결정된 건가?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는 속도가 가속화됐다.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훨씬 더 커졌지만 우리는 아직 위안부·정신대 차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이 역사를 박물관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고, 일반화된 선입견 속에 두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각성이 가능할까? 질문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부채의식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예술적으로도 끊임없이 대응하지만 그에 반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그라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다시 손잡게 된 셈이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사진=NEW 제공]


최근 영화 ‘귀향’, ‘아이 캔 스피크’ 등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커진 것도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 ‘귀향’이라는 영화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개봉했는데 많은 분이 마음을 열어줬다. 어려운 일이니 떠올리기도 싫어하는 선입견이 있어서 제작 자체가 쉽지 않았었는데 최근에는 법정 드라마로서 위안부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게 ‘만들어질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늘어났다.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는 있지만, 앞서 주눅 들었던 상태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그 외에도 현실적인 문제 제기가 많지 않겠나. ‘아이 캔 스피크’의 경우에도 여성 캐릭터가 남성으로 바뀌기도 했었는데. ‘허스토리’는 소재 면이나 등장인물 등이나 제작사가 우려할 만한 요소들이 많았다
- 현실적인 문제 제기는 언제나 있다. 애초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 그런 것에 흔들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영화 속 그런 우려를 반영해 해학적 지점을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관객들에게 그런 우려와 이유로 보여주지 못한 다양한 여성 서사를 끌어내 보자고 굳게 다짐했었다.

‘관부재판’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많다.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때면, 자칫하다가는 계몽적인 어투로 가르치려 들 수가 있는데. ‘허스토리’는 철저히 그 부분을 경계한 것 같다
-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있다. 긴 시간 동안 마음을 닫아왔고 할머니들을 구석으로 몰아 죄인처럼 살게 했으니. 급한 마음에 선동적, 계몽적인 프로파간다(특정한 사상적 노선·파당적 의도에 따라서 대중의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주려는 정보나 이론)를 목적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 쉽다. 하지만 (관객들이) 미안해서 이런 영화를 못 보는 건데, 구석으로 모는 강박적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먼일 같고, 남의 일 같지만 욕하지 않고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소박한 마음이랄까? 그런 ‘우리’ 같은 주인공이 등장해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는 지지와 연대를 담은 작품.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며 경계했던 것 같다.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연출에서도 그 부분을 많이 노력한 듯 보였다. 여타 작품들이 플래시백을 이용,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고통을 직면하게 만드는데 ‘허스토리’는 회상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맞췄다
- 플래시백 역시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힘이 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가진 시각적 힘을 한 번에 욕심내지 않았다. 법정 드라마로서 말의 힘에 큰 포인트를 둔 거다. 증언할 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보다 증언하러 오기까지 어떤 용기가 필요했는지 손동작과 눈빛, 작은 떨림이 어떤 의미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 말로 풀어간다는 건 시나리오·연출에서도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텐데
- 배우들의 열연이 큰 힘이 됐다. 텍스트로만 존재할 때는 언어가 주는 한계 속에서 얼마나 전달될까에 대해 의심이 있었는데 오랜 내공을 가진 배우들이 진심을 가지고 다양한 색깔을 표현할 때 다가오는 큰 울림을 느끼게 됐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배우의 연기라는 생각이다. 영화는 시각 예술로 대사보다는 이미지적으로 화두를 표현할 때 영화적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지 않나.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언어의 힘만으로 다른 문학이나 미술이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의 영역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가식이나 기술적 장식으로 자기 연기를 채우려 하지 않고 본질적인 힘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한편으로는 이 역사적 이야기는 어찌하여 만드는 사람을 이렇게도 진실에 집착하게 만드는 걸까? 질문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주셨다.

‘허스토리’는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구성돼있다. 여타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다양한 관계와 감정들이 표현되었는데
- 처음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우리들끼리는 (등장인물들을) ‘오션스11’이라고 불렀다. 10명의 원고단과 1명의 원고 단장이 바다를 왔다 갔다 하지 않나. 하하하. 여성이 주축이 되어 정부의 도움 없이 이뤄낸 소중한 승리의 흔적을 담아내고자 한 거다. 성별, 인종, 계급, 빈부 차이, 국가 정체성을 넘는 연대의 이미지가 보고 싶었고 할머니, 어머니, 딸, 일본의 남녀 통틀어 양심에 호소하는 영역에서는 장벽이 있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연대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근래 드물었던 여성 중심 캐릭터·서사라 관객들이 더 눈여겨보고 있기도 한데
- 남성 권력의 도움 없이 얻어낸 성과, 그런 이미지가 한국영화에 많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의 승리 서사가 주는 쾌감이 잘 표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30년 전 일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화두인 것 같다. 동시대성이 생기는 영화적 접점이라는 느낌? 하지만 그것이 실제 쾌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여자들이 주체적인 캐릭터로 이끌어가는 영화 많지 않다지만 막상 그런 영화가 나왔을 때 환영받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겠다.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각 세대의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구간이 만들어진 것 같다
- 할머니와 엄마, 딸이 등장하는데 유사가족의 형태다. 연대의 의미가 있다. 어느 날 시간이 흘러 엄마가 뒤로 물러나고 딸이 무대로 오르는 게 희망의 지점이고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대로 가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집회장면이 말씀하신 장면의 대표적 이미지인 것 같다
- 그렇다. 그 장면은 혜수 역의 이설 배우가 직접 수요집회에 참여해 만들어냈다. 이설 씨가 집회신청을 했고 직접 자신의 이야기, 고등학교 때 겪은 피해사례를 밝히며 발언장으로 참여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처럼 현장을 취재하듯 촬영했다. 영화는 짧게 편집되었지만, 굉장히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영화를 10분만 공개한다면 어떤 장면을 보여주고 싶나?
- 문사장(김희애 분)과 신사장(김선영 분)이 까불고 노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할머니들이 다 같이 한 프레임에 잡히는 장면? 택시 안에 욱여들어 간 모습, 작은 여관방에 누워 코를 골며 자거나 노는 장면들. 아주 힘든 삶을 살았지만 늘 눈물과 한숨으로 차 있는 게 아니니까. 농담과 웃음, 부대껴가는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대중들이) 알고 있으니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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