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규 칼럼]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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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입력 2018-06-1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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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가 찾아야 할 국경은 어디까지인가 -

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가면 진가사당(陳家祠堂)이라는 서원이 있다 .광둥성 72개 현의 진씨(陳氏) 일족이 제사를 지내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장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여기의 각종 건축물에는 온통 조형이 아름답고 색채가 화려한 공예품이 장식되어 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눈여겨보면 문살의 장식 중에 ‘설인귀파연개소문(薛仁貴破淵蓋蘇文)'이라는 글귀와 전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8개를 뽑아서 자식들을 가르쳐 온 그들이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얼마나 두려워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작은 반도의 울타리에 매여 스스로를 가두어 왔던가.

중국의 역사에서 본토 한족(漢族)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만주의 땅을 밟아 본 적은 딱 세 번이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612년)은 대군을 일으켜 총 113만3800명이 동원되었다. 전투병에 딸린 잡역부는 이보다 훨씬 많은 300만명이었다 한다. 세 번이나 원정을 나섰으나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영걸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정벌(645년) 역시 군사 100만명으로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양만춘 장군이 이끈 고작 10만명의 고구려 군민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제2차 고구려 원정(647년) 또한 실패하고, 이듬해 3차 정벌(648년) 역시 실패하였던 것이다. 천하의 성군으로 꼽히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룬 당태종이었지만 3차에 걸친 원정을 감행하다가 하나같이 실패로 끝났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중국인이 즐겨 보는 경극에 이를 반영,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제법 많다. 대개 이세민이 연개소문에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가 구해준다는 이야기이다. 경극에는 설인귀가 연개소문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개소문은 사실 이세민이 죽은 지 6년 뒤에 병사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

그리고 6·25전쟁 때이다. 앞의 두 번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과 연개소문, 양만춘 장군에게 패하여 다시는 관동(산해관 동쪽) 땅을 밟지 못하였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키기 전 마오쩌둥과의 담판에서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으로 3개 사단을 편성하였다. 이들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여 6·25전쟁 중 최일선에 배치되어 초기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압록강까지 진격한 우리 군과 유엔군에 맞서 김일성이 중공군을 끌어들이자 다시금 한족의 군대가 만주를 거쳐 한국 땅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당시 절호의 통일 기회를 놓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김일성과 중공군의 책임은 역사에서 반드시 정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70년간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각자 자신의 이념과 가치에 따라 따로 살아왔다. 북은 중공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의 이념과 가치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왔고, 남은 남대로 미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원칙하에 각자 살아왔다. 우리 민족은 민족대로 각자 단련을 받아 한층 성숙되고 다듬어진 세계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냉전체제의 마지막 대결의 장이 이제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다. 체제의 경쟁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나 있고, 엊그제 개최된 북·미 정상회담에 따라 앞으로의 진행 방향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때에 우리는 지난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아 다시는 역사에 남을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은 매우 우수하여 공동의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 역사의 고비마다 위기를 극복하여 왔고 그 어떤 강한 적도 퇴치하여 왔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안일에 빠져 언제 그리하였던가를 까마득히 잊곤 한다.

역사를 보는 시선을 이제는 가까이 북녘 땅과 만주 저편으로 넓혀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

지금부터 1000년 전 고려 예종 때 문숙공 윤관(尹瓘·?~1111)이 동북계 여진족을 몰아내고 고려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1108년(예종3) 2월 공험진 선춘령에 세운 비가 고려정계비이다.

윤관 대원수는 오연총(吳延寵·1055~1116) 부원수와 더불어 1107년 우리 역사상 고구려 이후 잃어버린 그 북쪽의 땅을 다시 찾기 위하여 관·민이 노력하여 17만 대군의 별무반을 창설한 후 동북계에 출진,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다. 이는 아주 보기 드문 예이다.

우리가 언제 군대를 양성하여 보란 듯이 잃어버린 실지를 회복한 적이 있었던가. 꾸준히 민족사에 전개되어온 다물 사상이 바탕이 되어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후 조정대신들의 모함에 돌려준 것을 350년 후에야 성군 세종대왕이 김종서(1383~1453)를 보내 다시 찾았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마도까지 정벌하지 않았던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선춘령 북쪽 700여리(270㎞)가 우리 땅이라 한다.



동아시아센터 회장 윤 창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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