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㉑] 불굴의 젊은 투사들 집결, 한반도 진격을 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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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2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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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전쟁의 마지막 승부수:작전명 독수리

 

[국내진공작전에 투입돼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다가 중국 시안으로 돌아온 국내정진대원들 (1945.8.20,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망명지에 낳은 아들, 후동이가 벌써 열여섯이 되었다. 이역만리를 떠돌며 자랐건만, 경우 바르고 올곧게 커준 아들이 대견했다. 그런 후동이가 충칭 교포사회에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간 난처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나이답지 않은 기특한 행동이기도 했다.
중국은 인적자원이 풍부했다. 마을 단위 추천으로 징집해도 병력이 넘쳤기 때문에, 전쟁 중이었음에도 학생들은 병역에서 무조건 면제됐다. 그런데 이 마을 단위 추천제도라는 게 협잡이다. 돈 있는 집 자식이 뽑히면 사람을 사서 대신 내보내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다른 지역에서 사람을 납치하기까지 했다.
대개 교육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러니, 병사들의 사기(士氣)는커녕 기초적인 무기조작법을 습득시키는 것조차 기대하기 힘들었다.
중국군의 질은 형편없었다. 일본군은 하늘과 바다에서 완전히 힘을 잃었지만, 중국군은 일부 부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을 거듭했다.
고심하던 중국정부는, 1944년 10월부터 군대에 고급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학생지원병 모집을 개시했다. 어느 나라나 학생들은 정의와 애국의 마지막 보루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려는 학생지원병의 수는 당국의 목표인 10만명을 훨씬 뛰어넘어 1달만에 30만명을 넘어섰다.

#열여섯 살 후동이의 자원입대
그 중에는 열다섯, 열여섯 나이의 어린 중학생들도 있었다. 학생지원병은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애국심에 불타는 학생들은 나무도장을 파서 자작(自作)으로 부모동의서를 만들었다. 어린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 수도 없고, 지원병 수가 예상을 초과했으므로, 당국은 입대 후라도 부모가 요청하면,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냈다.
그때 후동이는 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우사의 아들 진세(鎭世)와 김홍일 장군의 아들 극재도 그 학교를 다녔다. 성엄은 외아들을 지극히 아꼈다, 어느 날, 극재가 성엄에게 달려와 말하기를, 후동이가 학생지원병에 자원입대했다는 것이었다. 성엄은 어안이 벙벙했다. 유난히 몸이 약해 걱정하던 아들이다. 수당 부부는 후동이가 자원입대했다는 부대를 찾아가 부대장을 만났다.
알고 보니, 자기 나이나 체력으로는 합격이 불가능한 것을 알았기에, 나이를 속이고 신체검사도 친구에게 부탁했다는 거다. 입대는 자연 무효가 되었고, 부대장도 집으로 가라는데, 웬걸 후동이는 완강하게 버텼다. 1년 뒤에 광복군에 입대시켜주겠다고 다짐을 받고서야, 아들은 발길을 돌렸다.
피는 못 속인다는 이야기가 교포사회에서 돌았다. 하긴, 후동이는 임시정부 품 안에서 태어나, 백범, 석오, 우천 같은 독립투사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 가슴 속에서나마 일제에 대한 분노와 조국 해방에 대한 갈망이 싹트고 자라고 있었을 게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후동이는 임정의 ‘대표손자’였던 셈이다.
어쩌면, “이런 환경일수록 사상이나 이념이 개인을 압도하기 쉽다.”(<장강일기> p218) 수당은 아들 훈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우리촌”이라고 이름 붙인 투차오의 보금자리. 임정 식구들이 내 자식, 네 자식 가리지 않고 아이들을 보듬었으니, 예의범절 따위는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백범과 도노반 OSS 국장(시안 1945.8.7)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충칭으로 집결하는 젊은이들
마침내 1945년, 을유년(乙酉年) 그해가 다가오고야 말았다. 수당에게 그해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압박받는 동포를 구하기 위해 모여든 젊은 투사들을 맞이하면서 시작됐다. 1월 말,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된 학병 출신 광복군 50여명이 안후이성 푸양으로부터 5천킬로미터를 걸어서 충칭에 도착했다.
헌데, 충칭에는 이들이 묵을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아무리 망명정부라 해도, 선전포고까지 한 터에 고작 50명 병력을 받을 곳도 마련하지 못한다니. 수당들은 임시변통으로 투차오 우리촌의 교회 건물을 빌려, 강당을 침실과 식당으로 꾸미고, 청년 광복군들을 맞았다. 이런 일이 3년만 일찍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장준하(張俊河). 훗날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 사람. 그도 충칭으로 온 청년 광복군이었다. 수당의 기억에 남은 장준하는, 주일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던 다재다능한 청년이었다. 한필동(韓弼東). 어머니가 유관순의 사촌언니라 했다. 유관순은 옥사하고, 어머니는 7년을 숨어 살았다. 학병으로 끌려와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가, 중국군 장군과 의기투합해 집단탈출을 감행했다.

# 국내진공작전 요원으로 선발된, 조카 석동
청년 광복군들은 투차오에 머물다, 8명은 임정 본부에 경호 등의 임무를 띠고 남고, 나머지는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로 파견되었다. 당시 제2지대는 미군 해외전략처(OSS, 중앙정보부의 전신)와 협력해, 국내진공작전의 전초부대로 파견할 한인 청년 제1진 30여명의 훈련을 실시하기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훈련계획은 임시정부와 미국정부 양측 모두가 필요로 하던 바였다. 미군은 한인 청년들에게 무전송수신기 조작술 등을 교육시킨 뒤 한반도에 공수작전을 전개해, 일본군 정보를 수집하고 후방을 교란시키려 했다. 임정과 광복군으로서는 당연히 연합국 대열에 합류해 참전국 지위를 획득하려 함이었다.
청년전지공작대원으로 활약했던 조카 석동이도 선발됐다. 젊은 투사들은 이를 악물고 훈련에 달라붙었다. 당초 6개월 예정이던 필수교육과정이 단 석 달만에 끝났다.
오합지졸 같은 중국군만 상대해왔던 미군 교관들은 한국 청년들의 우수함과 독립을 향한 불굴의 감투정신에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순간만 해도, 임시정부는 내심 전쟁이 1년쯤 더 갈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1945년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2만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미군은 결국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게 독립전쟁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러나 임정은 몰랐다. 얄타에 모인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이 한국에 대한 5년 이상의 신탁통치에 합의한 것도, 미국이 원자탄을 만들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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