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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⑩] "윤봉길 의사 핏값으로 옷 해입으라니, 당장 물리시오"

남보라 기자입력 : 2018-04-05 18:48수정 : 2018-04-11 09:15
임시정부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자싱에 모인 임정 식구둘(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성엄, 김구 오른쪽이 엄항섭,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수당, 네번째가 엄항섭 부인 연미당이다.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수당이 피난보따리를 푼 곳은, 중국인 추푸청(褚補成)의 면사공장(綿絲工場)이었다. 그는 쑨원의 동지이자 중국국민당 원로 지도자로, 임시정부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이 면사공장에는 사무실 겸 간부 숙소로 쓰는 허름한 2층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여기가 임정 식구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석오, 성재 두 어른, 남파 박찬익과 일파 엄항섭 가족이 수당네 세 식구와 함께 살았다.
자싱(嘉興·가흥)은 상해 서남쪽으로 100km 거리의 작은 도시여서, 임시정부가 숨어 있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싱에서 상하이 거리만큼 더 내려가면, 남송(南宋)의 도읍(당시 이름은 臨安)이었던 큰 도시 항저우(杭州·항주)가 나온다. 임시정부는 항저우에 판공서(辦公署)를 설치하고, 국무회의 같은 주요 회합을 열었다.
성엄이 항저우와 자싱 간의 연락을 맡았다. 하지만 그 일이 탐탁지 않은 듯, 그는 임정의 밥만 축내고 있다고 여겼다. 남편은 삼십대 초반, 한창 일할 나이다. 어른들과 한집에서 기거하게 된 터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아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행동에 나서지 못할 바에야, 생활인으로서 자리를 잡는 게 먼저다.

#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백범이 그 공장에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백범은 따로 추푸청의 수양아들인 천퉁셩(陳桐蓀)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장강 하류에 위치한 자싱은 물의 도시. 백범이 쓰던 방은, 침대 밑 마루를 열고 내려가면 곧바로 호수와 연결되어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그곳마저 불안할 때는 아예 난후(南湖·남호)라는 호수에 떠 있는 배 안에 은신했다.
자싱에 간 지 여섯 달쯤 지나서, 곽낙원 여사가 손자 신을 데리고 도착했다. 지도자의 어머니를 적진에 놔둘 수는 없다. 임정은 비밀리에 사람을 국내로 보내 조손(祖孫)을 모셔왔다. 백범의 어머니는 임정 젊은 식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힘이 되는 존재. 곽낙원은 백범 혼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곽낙원은 배우지는 못했으나, 침착하고 대범하고 경우가 밝은 분이었다. 수당들이 돈을 추렴해 비단 솜옷을 사오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평생 비단을 몸에 걸쳐 본 일이 없네. 어울리지를 않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앉았는 건 온전히 윤 의사의 피값이야. 피 팔아서 옷 해 입게 생겼나? 당장 물려 와.”
백범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들었다. 일본군에 잡혀 매질을 얼마나 당했던지, 살이 터지고 피가 엉겨 주먹만큼 부어올랐다. 왜놈 군의관이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무작스럽게 도려내는데, 백범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운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수당이 임정의 맏며느리라면, 곽낙원은 임정의 어머니였다.
 

[성엄이 중국 지방정부 관리 생활을 할 때 수당 가족.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중국 관리로 취직한 성엄
성엄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수당은 남파 부인과 상의를 했다. 중국 사정에 밝은 남파가 신장성(新彊省·신강성) 성장(省長)을 지낸 임긍(林兢)이란 사람을 소개했다. 성장은 우리로 치면 도지사다. 임긍은 성엄을 중국인으로 속여 전원공서(專員公署)에 취직시켜주었다. 중국의 성(省) 하나가 한반도 전체보다 큰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군벌(軍閥)의 발호를 우려한 중앙정부는 성 아래 몇 개 현(懸)을 직할하도록 관리를 파견했고, 이것이 전원공사였다.
수당 가족이 성엄의 임지인 장시성(江西省·강서성) 펑청현(豊城懸·풍성현)에 도착한 게 1934년 봄이었다. 풍성은 이름만큼 물자가 풍성한 고장으로, 물가가 엄청 쌌다. 성엄이 받은 월급 20원은, 그 당시에는 한 가족이 그야말로 호강을 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풍성에 1년쯤 있다가, 우닝(武寧·무령)으로 발령을 받았다. 장시성 서북부의 후난성(湖南省·호남성)과 후베이성(湖北省·호북성) 두 개 성 인접지역에 있는 이곳에서 거의 3년 가까이 살았다.
1935년 9월, 수당은 성엄을 무령에 남겨둔 채 후동이만 데리고 백범의 어머니를 모시러 난징(南京·남경)으로 갔다. 백범 가족은 중국말이 서툴렀다. 백범부터가 그랬다. 중국 사투리는 거의 통역이 필요한 수준. 백범은 윈난(雲南·운남) 사람으로 행세했다. 한번은 진짜 윈난 사람이 반갑다고 찾아오자, 백범은 자신은 윈난이 아니라 하이난섬(海南島·해남도) 출신이라고 태연히 둘러댔다.
장남 인은 아버지를 따라 독립전선에 나섰고, 차남 신이 서툰 중국말로 시장을 보는 형편이었다. 아들이 천거하는 사람을 모두 싫다던 곽낙원은, 수당 말이 나오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신과 후동은 같은 소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는 둘을 ‘표형제(表兄弟, 중국에서는 내외, 이종 구별 없이 사촌형제들을 이렇게 부른다)’로 알았다. 관씨 성을 쓴 신은 관신(關信), 후동이는 진명(陳明).
 

[백범과 장제스의 난징 회담.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끊이지 않는 이합집산
진씨는 이(李), 왕(王), 장(張)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그 무렵, 성엄은 진해(陳海)라는 가명에, 청계(淸溪)라는 호를 썼다. 청계는 다름 아닌 서울 청계천. 호남성 장사(長沙)로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한 1938년 2월까지 만 4년 시간이, 수당에게는 중국에 망명한 세월 동안 그나마 한숨을 돌렸던 때였다.
항저우와 자싱으로 나눠져 있던 임시정부는 수당 가족이 장시성으로 떠난 뒤, 장쑤성(江蘇省) 수도 전장(鎭江·진강)으로 옮겼다. 이에 앞서 1933년 5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백범과 회담하고 임정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김홍일의 주선으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됐다(이 특별반은 일본의 항의로 1년 후 해산된다).
독립의 길은 요원한데, 이념, 지역 등의 차이에 따른 이합집산은 해소되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간판을 끌어안는 사람이 늘 생겨나기 마련이라, 두 파가 합쳐 하나가 되어도 결과는 똑같았다. 1935년 난징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만들었다. 그러나 주도권이 약산에게 돌아가자, 조소앙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재건을 선언했다. 그해 겨울 석오, 우천, 성재, 백범은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했다.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마각을 드러냈고, 일본 군국주의의 위협 앞에 중국대륙은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5천만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몬 제2차 세계대전. 세계는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미증유의 파천황(破天荒)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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