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⑦] 등장인물:잊혀진 영웅, 약산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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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0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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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상금 320억'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의열단의 의백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

[약산 김원봉.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김원봉과 그의 아내 박차정(왼쪽).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1918년 중국에 망명해 난징(南京)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다. 다음해 우당 이회영 등이 세운 만주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 폭탄제조법 등 군사학을 배우고, 일제와 무장투쟁을 맹세했다. 1919년, 동향 출신 동지 윤세주(尹世冑)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에 선출되었다.
의열단은 1920년대를 통틀어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투쟁조직이었다. 왜경이 그에게 내건 현상금 1백만원은 독립운동가에게 걸린 최고 액수였으며, 현재 화폐가치로 약 320억원에 달한다.
1925년, 무장투쟁을 테러에서 군사조직으로 확대․발전시킬 목적으로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중국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해 중국 지도자들과 깊은 교류를 맺고, 그 인맥으로 1932년에는 난징에서 조선인민혁명간부학교를 창설했다.
1935년, 우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한독립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의열단 5개 단체를 통합해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창당했으며, 중일전쟁이 터진 1년 뒤인 1938년 중국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 대장 자격으로 민족통일노선에 입각한 무장투쟁을 지도했다.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취임, 해방 후 귀국해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으나, 악질적인 친일경관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북으로 떠났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냈지만, 1958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서훈을 수여하지 않았고,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그의 무덤은 없다.
-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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