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②] 친일파의 땅 사기로 팔아 자금 댄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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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창우 기자
입력 2018-03-2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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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협과 윤치호

두암 전협(왼쪽)과 윤치호.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인간의 진면목은 인생 후반에 드러난다. 1회에 소개한 대동단 단장 두암(斗庵) 전협(全協, 1878~1927). 그는 젊어서 친일파 송병준이 조종한 일진회 총무로 출발, 이를 발판 삼아 약관의 나이에 부평군수로 출세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군수직을 버리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도모한다.
만주로 가기 직전, 두암은 군수직을 이용해 부평 관내에 있던 부재지주의 땅을 사기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이 부재지주의 이름은 윤치호. 갑신정변에 관여했다가 망명해 유학하고 돌아온 뒤, 독립협회 2대 회장, <독립신문> 사장․주필, 도산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장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 준비위원을 거쳐 친일파로 돌아선 그 윤치호다.
두암은 1912년 귀국해 남의 땅을 사취(詐取)한 죄목으로 3년형을 언도받는다. 두암이 잘한 짓은 아니었지만, 윤치호 역시 땀 흘려 번 돈으로 산 땅이 아니기는 매한가지였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한 게 1910년이고, 윤치호가 남작 작위를 습작한 게 1911년의 일이니, 일제 덕분에 몹쓸 재산을 지킨 셈이라고 할까.
훗날 두암은 대동단 단장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모진 고문 끝에 7년을 복역하고 병보석으로 출감해 병사했으며, 윤치호는 80세의 천수를 누리고 해방되던 해 뇌일혈로 죽었다. 수당 정정화는 자신의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개관논정(蓋棺論定)”이라는 옛말을 빌려 두암의 의기(意氣)를 기리고, 윤치호의 인생역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개관논정이란 쉽게 말해, 관 뚜껑을 여는 순간이 되어야 한 인간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다는 뜻.
송병준이나 이용구 같은 모리배들은 악명만 높았지,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테날디에에게 주었던 배역을 연기했을 뿐, 진짜 친일파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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