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오사五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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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2-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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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6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분류(分流)
나는 조용히 앉아 마음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생각들을 지켜본다. 생각은 외부의 자극이 오감을 통해 인식되면서 어디에선가 등장한다. 혹은 그런 자극 없이 오래전부터 기억에 간직됐던 이미지 혹은 상상력을 통해 생기기도 한다. 생각이 나의 말을 지배하고 말은 내 행동을 지배한다. 하루에도 수백 개 혹은 수천 개 이상 등장하는 생각의 공격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이해 방법은 없을까?

무질서하게 보이는 대상을 자신만의 원칙으로 구분하고 분류하는 행위가 추상(抽象)이다. 추상은 겉보기에는 서로 달라 보이는 생각들의 공통점을 찾아 몇 가지로 분류(分流)하면, 갑자기 등장하는 생각들에 당황하거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첩경이 된다. 생각이 입을 통해 표현된 것이 말이며, 말이 행위로 구체화된 것이 행동이다. 행동은 습관이란 반복을 통해 환경이 되고, 내 환경은 곧 나의 운명이 된다.
 
영국 오캄에서 태어난 중세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사제였던 윌리엄(1287~1347년)은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오캄의 면도날은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최적의 해답을 찾는 방법이다. 해답을 주장하는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가정(假定)이 가장 적은 시도가 해답이다. 오캄의 면도날은 윌리엄의 저작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윌리엄은 자신보다 앞선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피터 롬마르드의 글을 설명하면서 라틴어 문장 하나를 소개했다.

"Numquam ponenda est pluralitas sine necessitate"이다. 이는 '다수(多數)는 필요하지 않다면 결코 가정(假定)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수가 복수보다 힘이 있고 간결이 복잡보다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오캄의 면도날은 간결함의 원칙으로 후에 등장한 철학, 과학 그리고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사(五思)
파탄잘리는 과감하게 인간의 심연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드라슈트)를 가리는 호수의 물결과 같은 생각의 너울들을 ‘치타브리티’(cittavr̥tti)라고 불렀다. 그는 수많은 생각들을 단 다섯 가지로 줄여 설명한다.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저술하면서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관계, 인간의 유인원 안에서의 위치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처럼 파탄잘리는 인간의 생각들의 계보를 그려,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왜 파탄잘리가 생각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만 나누었는지 알 수 없다. 파탄잘리는 오캄의 면도날처럼 이런 단순한 구분과 계보가 가져다 주는 실질적인 혜택에 집중했다. 우리에게 매순간 달려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장악하는 잡념들을 종류대로 구분해 이름을 붙이고 파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혼돈에 빠질 것이다. 만일 그런 생각들을 바라보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요수 수행의 목적인 잡념의 ‘소멸’이 불가능할 것이다.
 
요가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수련하는 사람에게 생각들을 직시하라는 가시적인 표시를 수행자의 ‘다섯 손가락’에서 찾았을 수도 있다. 수련자는 자기에게 매순간 진입하는 생각들을 관찰하면서 이들에 대한 유형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분류한다. 이 분류는 생각들의 정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분석과 더불어 그것에 알맞은 대응 생각, 말, 행동을 전략적으로 기획할 수 있다.

‘요가수트라’ I.5에서 언급한 ‘오염되었거나 오염되지 않는 다섯 종류의 치타브리티’의 명칭을 I.6에서 소개한다. “프라마나 비파르야야 비칼파 니드라 스미르타야흐(pramāṇa viparyaya vikalpa nidrā smr̥tayaḥ).” 이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다섯 종류의 생각의 물결들은) 통찰(洞察), 착각(錯覺), 망상(妄想), 미몽(迷夢), 기억(記憶)(이다).” 파탄잘리가 제시한 다섯 가지 생각들을 편의상 ‘오사’(五思)라는 단어로 부르자.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6~11에서 이 다섯 가지 유형들을 구성하는 하위 유형들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생물학적인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인간의 생각인 치타브리티는 ‘속’(屬)이며, 다섯 가지 유형들은 ‘종’(種)이며, 그 하위 개념들은 ‘아종’(亞種)이다.
 
‘통찰’과 ‘착각’
다섯 가지 유형들, 즉 통찰·착각·망상·미몽·기억 가운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집착’(클리사)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생각은 ‘통찰’ 뿐이다. 나머지 넷은 집착의 산물들이다. 이 다섯 가지 중 외부 세계의 생물이나 사물을 직접 경험해 생기는 생각엔 두 종류가 있다. 그것이 ‘통찰’과 ‘착각’이다.

통찰은 관찰하는 대상의 겉모습을 통해 개별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속해 있는 보편성과 그 의미까지 파악한다. 내가 진돗개를 보았다고 가정하자. 나는 진돗개를 고양이와는 다른 종(種)에 속하며 영국 원산의 ‘잉글리시 토이 테리어’와는 다른 아종(亞種)으로 구분한다. 또한 진돗개는 고양이 속(屬)에 속하는 페르시안 고양이와는 다르다. 우리가 진돗개를 볼 때 잉글리시 토이 테리어와는 다른 진돗개의 개별성뿐만 아니라 진돗개가 다른 개들과 공유하는 일반적인 보편성까지 알아차린다. 통찰은 그 대상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모두 이해하는 종합적인 사고다.

그러나 착각은 정반대다. 예를 들어 진돗개를 보고 고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어떤 사람이 진돗개뿐만 아니라 개를 일생 동안 본적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사는 동네에는 온통 고양이만 살고 있어 갑자기 나타난 진돗개를 보고, 그는 이상하게 몸집이 큰 ‘고양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이 직접 어떤 대상을 오감을 통해 경험한 적이 없다면,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축척된 데이터 안에서 그 대상을 강제로 대입해 이해한다. 인간은 시간적·장소적으로 제한되어 태어나 교육을 받기 때문에, ‘착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해이며 편견이고 이기심이고 국수주의다. 이런 것들을 한마디로 ‘무식’(無識)이라고 부른다.
 

범증(范曽)의 '장주몽접'(莊周夢蝶)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망상’과 ‘기억’
이와는 반대로 외부의 자극이나 경험과는 상관 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생각들이 ‘망상’과 ‘기억’이다. 망상과 기억은 관찰하는 대상의 본질(드라스트르)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오감을 이용하여 감각적인 활동을 통해 마음속에 남겨진 흔적들이다. 기억은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기억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안주하여 주인노릇을 한다. 기억은 인간에게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해주며,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무형의 끈이 된다. 인간이 형성한 문화와 문명은 기억이 조작한 혹은 제작한 선물이다. 파탄잘리는 기억을 폄하한다. 기억은 인간이 이전에 경험한 사건들이 나름대로 질서와 논리를 통해 견고하게 되어, 인간과 공동체의 편견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이다.
 
‘미몽’
‘미몽’은 위에서 언급한 생각의 네 종류 유형과 전혀 다르다. 꿈에서는 무엇이 어떤 조합으로 나타날지 조절할 수 없다. 요즘과 같은 인공지능(AI)시대에 우리의 삶을 점점 혼돈스럽게 만드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일 수도 있다. ‘미몽’의 가장 유명한 예는 중국 도가 철학자 장자(莊子·기원전 369~289)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아주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 나였다. 도대체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이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이른바 ‘호접지몽’(胡蝶之夢)이다.

생의 무상함을 비유한 표현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의 취약한 모습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근대철학을 시작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 있다는 확신할 증거는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으며 내 생각이 모든 거짓일 수도 있다.”

내가 깊은 잠에 들어가지 않은 증거는 무엇인가? 컴퓨터나 핸드폰을 통해 전자게임에 들어선 ‘나’ 혹은 감동적인 영화를 보며 비극적인 주인공과 일체가 되어 눈물을 흘리는 ‘나’는 육체를 지니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나와는 다른 나인가? 파탄잘리는 ‘참 나’를 찾는 수련에서 인간에게 이름도 없이 다가오는 생각을 이렇게 다섯으로 나누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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