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자취(自炊)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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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입력 2018-02-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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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


역대급 한파가 연일 기승이다. 날씨가 몹시 추운 날이면 늘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자취(自炊)란 ‘가족을 떠나 혼자 지내는 사람이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할함’을 뜻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부흥하면 사람들의 생활 방식(Life Style)도 그에 따라 바뀐다. 요즘 역시 집을 떠나 혼자 살며 자취를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 방식은 40대 이상 세대들이 경험한 그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요즘은 어지간하면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다. 그조차 싫으면 전자레인지에 2~3분 데우거나 냄비에 끓이면 되는 즉석 쌀밥이 있다. 냉장고에는 가게에서 파는 갖은 반찬과 인스턴트 식품들이 가득하다. 전화 한 통이면 어떤 요리든 24시간 배달된다. 빨래는 세탁기가, 방은 보일러가 알아서 책임진다. 말이 자취일 뿐 예전 부잣집 자제들의 하숙 생활과 다를 것이 거의 없다. 그만큼 비용도 예전의 자취보다 훨씬 많이 든다.

내가 처음 자취생을 본 것은 1976년, 13살 어린 나이의 중학생 때였다. 조그만 포구였는데 중학교가 없는 근해 섬의 아이들이 읍내에 방을 얻어 같이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섬에 다녀오는 아이들은 그 어린 손으로 밥이며 간단한 빨래, 청소를 스스로 감당했다. 요즘의 아이들을 키워본 부모라면 중학교 1학년 자녀가 얼마나 어린 아이인지 알 것이다. 그 아이가 멀리 도시의 단칸방에서 직접 식사와 가사를 해결하며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젊은 부모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포구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시가 막 평준화됐던 K시 연합고사를 통과해 일명 ‘뺑뺑이 세대’ 고등학생이 됐다. 어머니의 노점상에 기대던 나의 학업 역시 하숙은 꿈도 꿀 처지가 못 됐다. 변두리의 가장 싼 연탄 아궁이 단칸방에서 상고 3학년으로 자취를 하던 사촌 형 방에 더부살이로 들어갔다. 1년 사는 사글세 방값이 14만원이었으니 내 몫의 방값이 한 달 6000원이었다.

물론 전기밥솥은 없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연탄불이나 석유 곤로에 밥을 지었다. 쌀을 씻고 물을 조절해 연탄불에 밥 짓는 법은 고향을 떠나기 전 어머니로부터 여러 번 실습을 받았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촌 형과 번갈아 아침 식사와 도시락, 연탄불 갈기를 책임지기로 했지만 ‘계급이 깡패’라 내가 빨래, 청소까지 이런저런 가사를 담당하는 날이 훨씬 많았다. 같이 방값에 생활비를 내면서도 나는 식모살이로 1년간 학교를 다녔다. 2학년부터 혼자 자취를 했다. 어쨌거나 고등학교 2학년 나이 때 객지에서 혼자 방을 쓰며 자취를 했다는 사실에는 아무 곳에나 함부로 기술할 수 없는 '비사(秘史)'가 혼재한다.

3학년이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삼’은 인삼, 산삼보다 더 대우를 받았지만 당시의 나는 재래시장에서 파는 김치와 어묵, 단무지, 간장, 참기름 정도의 반찬으로 연명했다. 찌개나 국을 끓일 요리 실력도, 돈도, 시간도 없었다. 지금처럼 춥고 눈이 무릎까지 쌓였던 2월 어느 날,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해 진 저녁에 돌아왔는데, 자취방에 갓 지은 밥과 소고깃국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수돗가에는 장년의 사내가 냄새에 찌든 자취방의 수건, 양말, 속옷, 체육복 등을 몽땅 꺼내다 얼음물에 빨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 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 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이시영 시인의 ‘차부에서’란 시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다만 ‘곰 같은 큰 손’을 어린 아들의 어깨 위에 턱 올리며 거칠고 젊은 매표원을 노려볼 뿐이다.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우리는 누구라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고, 우리 또한 그런 아버지로 살고 있다. 날씨가 이리 추운 겨울이면 객지의 어린 아들을 위해 손수 밥상을 차려놓고, 수돗가에서 등을 구부린 채 언 손으로 빨래를 하고 있던 장년의 사내가 늘 생각난다. 인생은 나에게 그 사내의 양말과 속옷을 손수 빨아드리고, 따듯한 밥상을 차려 술 한 잔 쳐드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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