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94] 남송정벌은 왜 필요 했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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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2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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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파괴하지 않고 손에 넣고 싶어 한 남송

[사진 = 항주의 대운하]

위대한 도시 대도건설을 통해 바다로 향하는 꿈을 펼치기 시작한 쿠빌라이는 다음 수순으로 장강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남송을 접수하려는 작업에 착수했다. 대도 건설과 남북대운하 정비는 애초부터 남송을 손에 넣는다는 기본계획아래 추진됐다는 점에서 남송과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수순이었다.

바다를 통해 자유롭게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을 남송이 차지하고 있는 한 거대한 해상제국의 꿈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쿠빌라이는 바다를 바탕으로 거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는 남송을 가능한 한 파괴하지 않고 손에 넣고 싶어 했다.

▶ 5대10국 시대 마감, 宋 건국

[사진 = 조광윤 초상화]

송(宋)나라는 조광윤(趙匡胤)이 세운나라다. 당(唐)이 멸망한 이후 무인들이 여기저기서 나라를 세우면서 중국 대륙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른바 5대 10국(五代十國)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송의 태조 조광윤은 5대 가운데 하나인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죽을 때 금군(禁軍)의 원수가 돼 실권을 장악한 뒤 금군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사진 = 송나라 황제 행렬]

이후 혼란한 5대10국 시대를 마감시키고 960년 송나라를 건국했다. 나라를 세운 뒤 조광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인의 세력을 약화시킨 일과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두 조치 모두 군사력을 가진 무인세력들이 반란을 도모하는 것을 막기 위한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관리와 군대의 지휘관 등을 대부분 문인들로 채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인의 나라가 됐다.

▶ 경제 발달한 문인의 나라

[사진 = 항주 용정차 재배지]

문인의 나라인 송(宋)은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모작 등을 통한 농업 생산력도 증대됐다. 또 차 재배, 도자기 제조업 등 수공업의 발전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많은 용품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경제적 발전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도시가 성장하고 서민들의 생활이 여유로워졌다. 자연히 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예를 들어 노래와 만담, 곡예 등 오락 문화와 함께 소설과 수필 등 문학이 크게 발달했다.

주변 나라에 비해 경제적으로 월등이 앞서 갔던 송나라지만 문인 중심 정책 때문에 군사력이 약해 주변국과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번번이 패전국이 되는 수모를 안았다. 그래서 요나라와 서하 등에 해마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지배층은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서민들이 그 부담을 안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자 왕안석(王安石)이 신법개혁을 통해 국가재정의 재건과 중산층을 육성하려는 시도를 했다.
 

[사진 = 송나라 측후기]

왕안석의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가 죽은 뒤 대지주와 대상인 그리고 지배층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개혁파와 비개혁파 사이에 당쟁이 이어졌다. 1,115년 북쪽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운 뒤 송나라와 연합해 거란족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아골타는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타협약속을 파기하고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면서 북송은 망하고 만다. 북송이 정강연간(靖康年間 1126-1127)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고 해서 역사는 이를 정강(靖康)의 변(變)이라고 부른다.

▶ 바다로 뻗어간 남송

[사진 = 경덕진 도자기 공장]

장강 이남으로 피난 간 송나라의 세력들은 지금의 항주(杭州)인 임안(臨安)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다시 정비 했다. 이때부터를 남송(南宋)이라고 부른다. 화북지방을 잃어버린 남송은 바다를 통한 국제무역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래서 배를 만드는 기술과 항해술은 물론이고 나침판과 지도를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해 그 분야는 당시 세계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무역의 중심이 비단길에서 바닷길로 옮겨갔다.

[사진 = 경덕진 도자기]

특히 비옥한 장강 유역의 강남지역이 개발되면서 농업은 물론이고 상공업이 크게 성장해 비단과 도자기 그리고 종이 등 각 지방의 특산물이 바다를 통해 해외로 팔려 나갔다. 해외 무역을 관리하는 시박사(市舶使)라는 관청을 둘 정도로 해외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임안은 물론이고 광주와 천주 등 강남 해안의 도시들은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발 돋음 하게 된다. 그래서 남송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바닷길의 출발점이 됐다.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완성을 꿈꾸는 쿠빌라이로서는 바다로 뻗어 있는 남송을 반드시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것도 파괴되지 않은 채 접수해야만 했다.

▶ "반드시 필요했던 남송 정벌"

[사진 = 리구어창교수 (중국사회과학원)]

쿠빌라이가 남송 접수를 통해 바다를 장악하려 했던 것과 관련해 중국사회과학원의 리구어창교수는 "몽골인들이 초원에서 온 민족인데도 해상 세력을 강화하려고 특별히 노력했던 것은 해상 경제발전을 통해 경제적 부를 확보하고 국제적 명성을 높이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사진 = 잉크체첵교수(몽골 국립대)]

몽골 국립대의 잉크체첵교수도 "송나라는 전통적으로 무역과 수공예품이 발달한 나라였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도시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안도시를 열고 바다로 나가려던 쿠빌라이에게 남송 정벌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유업을 받든다는 또 하나의 의미도 있었다. 남송 원정길에 숨을 거둔 할아버지의 유업을 마무리 지어 중국 대륙 전체를 한꺼번에 장악하는 것은 대몽골제국의 계승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 남송 국정 농락한 가사도
남송은 당시 간악한 대신 가사도(賈似道)가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뭉케가 급사한 뒤 남송 공격이라는 도박을 선택했던 쿠빌라이가 악주를 공격했을 때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났던 가사도는 쿠빌라이와 정전협정(停戰協定)을 맺었다. 그리고 도강하는 몽골군의 후미를 공격해 약간의 손실만 입힌 뒤 임안으로 돌아갔다.

몽골군을 무찔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임안으로 돌아간 가사도는 영웅대접을 받으며 우승상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그렇지 않아도 후궁이었던 누이 덕분에 고속 승진했던 그는 이후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15년 동안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 기러기 편지(雁書)의 일화
악주전투 후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정전협정을 다시 협의하기 위해 유능한 한인 참모 학경(郝經)을 사신으로 남송에 보냈다. 몽골군에게 대승했다고 속였던 가사도는 정전협정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학경 일행을 임안에 도착하기도 전에 붙잡아 구금했다. 이후 학경은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15년 동안 그 곳에 억류돼 있었다.

억류돼 있으면서 학경은 자신의 생존과 남송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북으로 돌아가는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묶어 보냈다. 학경이 구출된 뒤 편지가 개봉에서 발견되면서 생겨난 이른바 기러기 편지(안서:雁書)의 일화다.

▶ 가장 큰 장애물 장강
민심이 크게 이반 돼있는 남송의 전력(戰力)은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지만 정작 몽골군으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어려움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강과 지천에 늘려 있는 크고 작은 하천과 호수였다. 광활한 초원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몽골의 기마 부대도 물 앞에서는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사진 = 항주 시민들]

그래서 남송과의 전쟁은 이미 30여 년 전인 칭기스칸 시대에 시작됐지만 간헐적인 공방만 있었을 뿐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동생과의 제위경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방관자 입장에 서 있던 많은 군벌세력을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것만 봐도 수전(水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 인내 끈기를 바탕으로 한 장기전략

[사진 = 남경 장강대교]

당시는 전시효과를 위한 일시적인 작전이었지만 이제는 실제로 강을 건너 남송군을 완전 제압해야 하는 과제가 가로 놓여 있었다. 어떤 인공적인 장애물보다 두려운 천연적인 장애물인 장강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남송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쿠빌라이는 통상의 전투방법으로는 남송을 제압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것은 단기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방법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장기적인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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