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한담冬夏閑談] 굴원의 정의(正義), 누이의 정의(情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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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입력 2017-11-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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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而見放屈三閭 충성해도 추방당한 삼려대부 굴원
椒澤蘭皐欲卜居 향기 연못 난초 언덕 살려하였지
如令早聽申申戒 일찌감치 신신당부 듣게 했다면
應不將身飼鼈魚 자라와 물고기 밥 되지 않았을 것을
(미상, 『의고미인도』 100수 중 ‘女鬚’)
 
오늘은 어느 누이의 절절한 심정을 담은 시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그녀는 이른바 충절의 화신이라 불려도 아깝지 않을 굴원(屈原)의 누이였다. 주군인 초나라 회왕(懷王)에게 버림받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이가 굴원이니, 사마천이 그려낸 굴원의 최후는 ‘돌을 껴안고’ 서서히 물로 들어가는 비장함이었다. 이 고고함은 후대의 수많은 선비들이 ‘감히 따라 하지 못할’ 귀감이 되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안타까워했다. 왜 그토록 고결해야만 했을까 하고 말이다. 이는 '워너비'(wannabe)의 역설이다. 굴원은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고 싶지만’ 결코 쉽게 될 수 없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굴원에게는 누이가 한 명 있다고 전한다. 이름은 여수(女鬚)인데, 우리는 이 여인을 굴원이 지은 '이소(離騷)'라는 장편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시종일관 나라를 향한 걱정, 그리고 그 나라를 흔드는 소인배들을 향한 분노와 실망으로 점철된 내용 속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즉, 여수가 굴원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그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너는 왜 그리 과하게 정직하더냐. 혼자서만 절개를 지닌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란다. 모두들 서로 얽혀서 살아가지 않니? 사람들과 떨어져 어울리지 못하니 마음이 너무나 안타깝구나.”

위의 시 3,4구에서 “일찌감치 신신당부 듣게 했다면, 자라와 물고기 밥 되지 않았을 것을”이라 한 이유는 바로 누이의 통한(痛恨)에서 기인한 것이다. 기실, 굴원에게 세상과 섞여 살아보라 청한 이는 누이뿐 만이 아니다. 그가 실의에 차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강가를 거닐 때 ‘온 세상의 취한 이들과 함께 배불리 술지게미를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일러준 어부도 있었다. 결국 누이와 어부는 굴원을 향해 손을 내미는 동일인물인지도 모른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쓰이지 못하는 일도 개탄스럽고, 동생의 죽음을 막아야만 했던 누이의 자책도 안쓰럽기는 매한가지이다. 굴원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정의(正義) 있었을 것이고, 여수에게는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기필코 말려야만 했던 정의(情誼)가 있었을 터이다. 언뜻 보면 담담하게 지난 일을 술회하는 어조이지만, 이 시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길항(拮抗)이 있다.

세상과 섞여 이러구러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힘겹다. 그러나 이들이 있어 이 세상은 조금씩 살만하게 변한다. 그 사실에 문득문득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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