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수칼럼] 원전의 운명, 결정 방식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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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수 초빙논설위원· 언론인 ​
입력 2017-10-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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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수칼럼]

 

[사진=육정수 초빙논설위원· 언론인 ​]


원전의 운명, 결정 방식이 틀렸다.

신고리 원전 5·6호기가 살아나는가 싶더니 탈(脫)원전 목표는 변함이 없단다. 탈원전을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심사를 도무지 모르겠다. 지난 20일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의 5·6호기 건설 재개 결정이 발표되면서 한숨을 돌렸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문 대통령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조속히 재개하겠다”고 승복하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원전 선진국 한국’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토를 달았다. 더 이상의 신규 원전 건설은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이미 작년 12월 탈원전 결심을 내비친 바 있다. 원전 사고를 소재로 한 영화 ‘판도라’를 본 뒤 “사고 확률이 수백만분의1밖에 안 되더라도 탈핵·탈원전 국가로 가야 한다”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보도됐다. 리히터 규모 6.1의 지진을 상정한 영화이지만 당시 전문가들은 “6.5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게 내진설계를 하므로 이 영화는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탈원전 결심을 더욱 굳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할 때만 해도 다수 국민이 원전 건설 재개라는 반전(反轉)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건설 중단 결론을 내리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건설 중단 결정은 의외의 결과였다.
그러나 신고리 5·6호기는 건설 재개 발표에도 불구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3개월여의 공사 중단으로 1000억원 이상 손실이 발생했고, 부식된 철근과 자재 등의 안전 점검을 위해 공정(工程)이 반년 이상 늦춰질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탈원전의 기본 원칙은 포기하지 않아 신규 원전 전면중단을 둘러싼 갈등은 언제 또다시 불거질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 471명이 59.5% 대 40.5%의 다수로 ‘건설 재개’를 선택한 것은 귀중한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결정은 시민참여단 다수의 이성과 전문가들이 제시한 과학적 진실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다른 연령대보다 높은 20, 30대 젊은 층이 건설 재개로 기운 것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고무적인 일이다. 반(反)원전 환경론자들의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실용적 판단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극단적인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시민의식의 성숙과 저력을 보여준 점도 높이 살 만하다.
정부는 물론 여야 모두 이번 결과를 승패의 차원에서 계산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반 국민도 마찬가지다. 찬반 어느 쪽도 아쉬움이 없지 않겠지만 비교적 질서정연한 가운데 결론을 도출해냈다는 점에서 일단 국민 모두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미래가 달린 중요정책을 토론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며 중지(衆智)를 모은다면 얼마든지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본다.
다만 이번 결정을 계기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논란과 갈등이 있는 국가적 과제마다 이번처럼 수백명의 일반 시민을 장기간 동원해 학습과 갑론을박 등 숙의(熟議) 과정을 밟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 직접민주주의냐, 대의(代議)민주주의냐 차원의 민주주의 방식에 관한 문제다.
시민참여단 논의 방식은 고대(古代) 그리스·로마시대의 광장민주주의, 즉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국민의 의사를 직접 묻고 결정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같은 인구 수백만 내지 수천만 이상의 국가에서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이런 식으로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포퓰리즘과 선전·선동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현대 국가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대표들을 선거로 뽑아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대신 운영하도록 위임하는 대의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행정부 수반(首班)인 대통령은 각 부처의 모든 업무를 지휘 통할하는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계속 여부는 대통령에게 최종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이라는 법적 근거도 없는 기구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논의와 판단을 맡겨버렸다. 이런 방식이 가장 민주적인 논의 기구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무책임한 국정운영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라면 애초부터 원전 전문가 집단에 의뢰해 입증된 과학적 지식, 재난사고의 위험성 여부,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심도 있게 검토했어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마지막 결단을 해야 국민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전문성이 없는 일반 국민 수백명을 동원해 투표에 의한 여론조사 방식으로 결정하도록 떠넘긴 것은 책임회피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정부가 사드(THAAD) 배치 및 북핵 위협에 대비한 한·미 공조에서 불필요한 난맥상을 보인 것도 원전 문제에 관한 부적절한 대응방식과 닮았다. 이들 문제에 대한 안이하고 부실한 대처로 국민의 안보 불안감을 증대시킨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적폐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역대 정부의 치적을 깎아내리고 지도급 인사들의 먼지를 털어 증오를 확산시키기보다는 다급한 정치, 경제, 외교안보 등 국가적 중요 현안에 국력을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과거 인물들에 대한 심판이 당장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5년후 오늘의 권력자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겸허한 마음으로 국사(國事)에 임해주기를 기대한다.

<위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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