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의 변방별곡] 나는 국수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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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 작가
입력 2017-07-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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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명수]

나는 국수주의자다.

나는 ‘국수주의자’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아올리는 도발을 감행하고 우리는 사드 추가배치로 맞불을 놓는 등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끼니는 해결해야 한다.
끼니 때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는 나는 행복한 국수주의자다. 요즘같이 장마와 폭염이 동시에 찾아오는 변덕스러운 한여름에는 더더욱 국수주의자의 하루는 단순해진다. 별다른 고민 없이 맛있는 국수를 찾아나서면 그만이다. 살얼음 동동 띄운 평양냉면이나 열무김치로 풍미를 더한 냉말이 국수면 어떻고, 따뜻한 안동국시 한 그릇으로 ‘이열치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면 화요일은 비빔국수를 먹게 되고, 수요일은 멸치육수 맛이 강한 ‘구포국수’, 목요일은 냉면, 금요일은 돈코츠라멘 같은 일본라멘, 토요일은 중국국수인 ‘도삭면’을 찾아나서기도 한다. 다음 주는 쌀국수 혹은 메밀소바, 시나면, 스파게티 등등 매일매일이 새로운 국수를 찾아나서는 면식기행(麵食紀行)이다.

이처럼 국수는 '천변만화(千變萬化)'다.
서민의 음식이었기에 춘궁기에는 모든 식재료를 활용해 ‘구휼’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음식으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음식이 있다면, 그것은 국수 외에는 없을 것이다. 국수는 또한 온갖 재료로 만들어낸 육수와 고명에 따라 갖가지 변화된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의 오감을 만족시켜왔다.
누들로드의 시발지인 중국 산시(山西)성에서는 국수에 대해 ‘一个面百样做一个面百样吃(한 가지 국수라도 만드는 방법은 백가지가 있고, 같은 국수라도 백가지 방식으로 먹을 수 있다)'이라곤 한다. 국수가 가진 다양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들 중에 이보다 더 딱 들어맞는 말이 없다. 그러고 보면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우리보다 더 다양하고 맛있는 국수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국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국수는 이미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국수유감’이다.
아니 소위 한 전직대통령의 걸맞지 않은 표현같이 ‘불어터진 면발’ 같은 국수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턱없는‘ 가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일부 국수집에 유감이다.
유교문화의 본산인 경북 안동은 우리나라 국수의 대표 격인 ‘안동국시’를 자연스럽게 세상에 내놓았다. 국수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서민들은 맛볼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귀한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특별한 맛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르는 특별한 요리였고, 양반들의 생신상에 올라 긴 면발처럼 ‘장수(長壽)'를 축원하는 행복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누들로드의 본고장인 중국 산시성에서도 길고 긴 한 가닥으로 뽑아낸 면발을 자랑하는 이건몐(一根面)은 장수를 기원하는 ‘창서우몐(長壽面)'으로 달리 불려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와대 만찬에 국수를 내놓는 대통령이 있었다. 국수는 대통령의 ‘서민 코스프레’에도 제격이었다. 그가 대통령 당선 전에 즐겨 찾던 서울의 안동국수식당은 그 후 유명인사들이 자주 들락거리면서 소위 ‘대박’이 났다.

안동국수가 ‘안동국시’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봉지에 담긴 밀가루’가 아닌 ‘봉다리’에, 밀가루가 아닌 ‘밀가리’로 반죽을 해야 한다는 사투리개그는 애교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안동국시의 미학은 국시 한 사발로는 돌아서면 허기질 것을 염려해서, 조밥 한 그릇 살포시 담아내 놓고 간고등어 조림 한 접시 반찬으로 곁들여주는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된 안동국시라는 것을 뒤늦게 안동에 내려와서야 알게 됐다.
어쩌다 상경하게 되는 날이라도 국수주의자의 발길은 서울의 맛집으로 소문난 국수식당들로 향하게 된다. 모처럼 찾게 된 한 서울의 유명 국수집. 조밥도, 고등어조림도 없는 국수 한 그릇이 1만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안동국시의 원래 모양새와 맛과도 많이 비켜나 있는 새침떼기 ‘서울국수’지만 안동이라는 브랜드가 비싸다는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주는 것 같다.

한 그릇에 1만원을 넘는다면 그것은 국수에 대한 발칙한 도발이다.
국수는 태초에 간편하게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태어났다. 부자와 가난한 서민, 왕과 백성 가리지 않고 즐겨 먹을 수 있는 평등과 공평을 상징하는 음식이 국수였다. 중산층의 소비물가수준이 우리나라를 넘어선 중국에서도 최고급식당의 국수 한 그릇 가격이 30위안(元·5000원)을 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대부분 5~10위안에 불과하다.
그런데 서울에서 안동국시로 유명해진 한 식당은 물론이고 유명 냉면집의 냉면 가격도 1만5000원을 넘어섰다. 특별한 비법으로 그만한 가격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가격을 받아들이는 고객들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유감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국수를 먹었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늘 국수를 먹으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국수는 손님이 오면 정성 들여 빚어내는 마음이 담긴 귀한 음식이고 인스턴트라면처럼 누구나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흔한 음식이다.
국수 한 그릇에 조밥 한 그릇 곁들이는 안동국시의 미학, 보통과 ‘곱빼기’의 가격을 구분하지 않는 평등의 구포국수 여유가 왜 서울에서는 사라지게 된 것인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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