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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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4-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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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관용과 포용으로 빨치산도 감복시킨 빨치산 토벌대장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 붙잡힌 포로들에게 매우 관대했다. 토벌작전 중에는 누구 못지않게 용감하게 전투를 지휘하면서도 막상 전투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빨치산 포로들은 물론이고, 죽은 빨치산들까지도 인격적으로 대해줬다.

 포로들에 대해서는 되도록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고, 죽은 빨치산들도 한때는 총부리를 겨눈 적이었지만 같은 동포로서 망자(亡者)로서의 예를 갖춰 매장해 줬다. 죽은 뒤에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지 죽어서까지 빨치산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차일혁이 빨치산 포로들에게 관대하게 대해 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차일혁은 약자에 대해서는 늘 관대했다. 비록 전투 중에는 생사를 다투는 적이라고 해도 일단 포로가 되어 무장이 해제되면 저항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저항력이 없는 빨치산포로는 결코 위해를 가하거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 포로들을 험하게 다루거나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교육했다. 차일혁은 되도록 포로들을 보면 전향하도록 권하고, 전향을 거부하면 전쟁포로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러다보니 빨치산들은 차일혁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존경했다. 빨치산들도 차일혁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으면 차일혁이 빨치산 포로들을 대우했던 것처럼 대우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세를 잃으면서 점차 난폭해졌고, 포로들에 대해서도 잔인한 방법으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빨치산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이는 계속되는 군경의 토벌에 시달려온 빨치산에게 더 이상 여유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차일혁은 되도록 빨치산들이 싸우지 않고 귀순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차일혁은 직접 선무(宣撫)용 전단을 작성했다. 1951년 4월, 정읍작전을 앞두고서다.

 “빨치산 간부 및 전사들에게! 빨치산 전사와 그 간부들에게 이 글을 보내노니, 그대들 지휘관의 눈을 피하여 끝까지 읽어보고 믿어주시오. 이 글은 어쩌면 그대들 자신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대한 것이므로 진심으로 그대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바입니다. 빨치산 전사들, 그리고 간부 여러분. 그대들의 귀여운 자녀와 다정한 아내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입산한 지 이제 6개월이 지났습니다. 작년 겨울 무서운 추위에 그대들 손발은 얼어터지고, 심신은 모두 지쳐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 빨치산 전사, 간부 여러분. 이제 우리 경찰과 군인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단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권고하니 따뜻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시오. 매일 밤 그대들 친지가 있는 부락에 내려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하는 것이 그대들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도 달뜨는 저녁, 꽃피는 아침 깊은 산중 고요한 가운데서 한줄기 눈물을 흘렸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과 피를 나누어 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들 지휘관은 지금 그대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비록 누추할망정 그대들 가족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오시오. 우리는 같은 민족 한 형제로 언제부터 우리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알았단 말입니까. 인간 본연으로 돌아와 형제의 품에 안기시오. 나와 조상의 명예를 걸고 그대들에게 약속합니다. 그대들에게 어떤 죄가 있더라도 진심으로 과거를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관대히 선처하여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는데도 나의 충고를 무시한다면 필경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로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어서 빨리 그대 지휘관들의 허위에서 벗어나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시오.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車一赫).”

 차일혁의 선무용 전단을 본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은 ‘귀순자 취급의 특별지시’를 차일혁이 작성한 전단 뒤에 다음과 같이 추가하도록 했다. “-하산 귀순자들에게는 생명 보장은 물론 일절 편의를 제공하기 바람. -자수 귀순하는 자에 대해서는 생명을 절대 보장하고 일절 위협을 가하는 수단을 엄금함. -귀순 중 귀순 권고 삐라를 소지하고 귀순하는 자는 특별히 우대하여 직장 알선, 여비 조달 등 편의를 제공할 것. -무기를 휴대하고 귀순하는 자에게는 후상(厚賞)을 주고 본관에게 즉시 보고하라. 전라북도 경비사령관 경무관 김의택, 사찰과장 총경 이병희.” 이렇게 해서 차일혁이 최초 작성하고 도경국장이 추가한 귀순용 전단은 각 경찰서와 전투경찰대에 공문으로 하달된데 이어, 대량으로 제작되어 작전지역에 뿌려지게 됐다. 빨치산토벌을 하는데 있어서 차일혁은 효과적인 방법을 모두 강구하는 융통성 있는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 아군이든 적이든 가급적 희생을 줄이려는 차일혁의 인간미가 눈에 띈다.

 차일혁은 토벌작전 중 여자포로들도 상대해야 했다. 1951년 4월 15일 새벽1시, 차일혁 부대는 내장산에 은거한 빨치산들을 습격했다. 칠보발전소 탈환에 이은 동계토벌작전으로 밀려났던 빨치산들이 3월 중순부터 다시 집결하기 시작, 사흘 전부터 내장사를 점거하고 있었다. 적의 총인원을 알 수 없고 현재 절 안에는 30여명의 여승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들을 빨리 구해달라는 주지승의 간곡한 부탁이 있은 터였다. 지형에 밝은 정읍경찰서 대원들을 각 소대에 배속시켜 작전을 개시했다. 제17전투경찰대대와 정읍경찰서 부대는 정면을 공격하고 차일혁이 직접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는 적의 예상 후퇴 지점을 막고, 후미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일혁은 유격전에서는 적의 정면보다는 적의 예상 후퇴 지점에 실전 경험이 많은 우수한 병력을 배치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드디어 작전이 개시됐다. “1중대는 내장사로 진입할 것. 2중대는 신선봉 방향으로 진격할 것. 3중대는 태암봉 방면에서 양쪽을 엄호하며 진격하도록.” 그런 후 차일혁은 1중대장을 따로 불러 “길을 피해 계곡을 따라 절에 접근하도록 하게. 2인 1조로 최소한 10미터의 간격을 두고 올라가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절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게. 놈들을 밖으로 유인해서 사살해. 그리고 스님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하네.”라며 각별히 당부했다. 하지만 내장사는 작전 중 불에 탔고, 여승들은 내장사 뒤편의 암자인 불출암으로 끌려갔다. 차일혁은 대원들을 지휘하여 불출암으로 달려가 여승들을 구했고, 그 속에 숨어있던 여자 빨치산 3명도 포로로 잡았다. 내장사를 벗어나 도주하던 부상을 입었거나 본대와 떨어진 여자 빨치산들이 급히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가장했다. 차일혁은 그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방금 깎은 윤기 있는 머리와 핏자국이 있는 여자 빨치산들을 여승들의 무리 속에서 쉽게 찾아냈다. 차일혁의 고도로 발달한 전장에서의 직감이 작용했다. 빨치산 특유의 썩은 냄새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차일혁 앞에서 여자 빨치산들은 거세게 반항했다. 차일혁은 “안심해라, 아무도 너희를 해치지 않는다. 원한다면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며 꿇어앉은 세 여자에게 말했다. “수작마라! 네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우리 동지들을 남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서 우리를 죽여라! 그 편이 우리로서도 깨끗하다!” 세 명중 얼굴이 길고 주걱턱으로 앙칼진 눈매를 한 여자가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반항했다. 그러나 차일혁은 이미 그들의 처리를 결정했다. 이날 작전에서 차일혁 부대는 적 사살 21명, 카빈 2정, M1 소총 1정, 백미 4가마를 노획했다. 그리고 생포한 여자 빨치산 3명은 투항으로 처리했다. 그녀들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함이었다. 차일혁은 본부중대장에게 “이 세 사람은 귀순으로 처리한다! 내장사 공격 시 끝까지 저항하던 나머지 공비들은 도주했지만, 이 세 사람은 대열을 빠져나와 우리에게 투항했다, 알았나?” 눈이 휘둥그레진 본부중대장은 무언가 입을 떼려다 말고, “넷, 알겠습니다!”라며 대답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이 잡은 포로 중에는 여러 부류의 빨치산들이 있었다. 크게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됐고, 신분상으로는 북한군 정규군 출신의 패잔병들과 지역 골수 빨치산들이었다. 그런데 지역 빨치산들 중에는 본의 아니게 끌려온 자들도 있었다. 차일혁은 이들 빨치산 포로들 중 여자들과 본의 아니게 끌려온 자들은 가급적 귀순자로 처리해 처벌을 가볍게 받도록 배려했다. 또 북한군 정규군 출신의 포로들에 대해서는 군인으로서 정식 포로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51년 8월, 가마골작전시 차일혁은 부상이 가벼운 3명의 빨치산들을 생포하여 심문한 후, 그들을 전주로 후송시켜 공비로서가 아니라 ‘인민군’으로서 포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줬다. 차일혁이 3명의 포로들을 심문해 보니 그들의 평균 연령은 17세에 불과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긴 차일혁은 그 ‘가엾은 공비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비가 아닌 인민군 포로’로 대우받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조치했다. 차일혁은 무장이 해제된 포로에 대해서는 가급적 인격적으로 대했다. 포로들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가혹행위를 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했다. 토벌한 빨치산의 소지품에서 부하들의 유품이 나와도 “절대 감정으로 대하지 말고 포로로서 공정하게 대우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차일혁은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포로들마저도 과감히 용서했다. 차일혁은 자신과 생사를 걸고 싸웠던 적의 장례까지 치러줬던 인간미가 넘치는 ‘포용과 관용(寬容)의 경찰’이었다.

 차일혁이 빨치산의 한 주검에 대해 가장 극적으로 ‘예(禮)’를 갖춘 것은 다름 아닌 빨치산총사령관인 이현상(李鉉相)의 장례식이었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친척들도 선뜻 나서지 않은 ‘이현상의 장례’를 손수 치러줬고, 그 과정에서 이현상의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권총을 뽑아 실탄 3발을 발사하며 조총(弔銃)으로 대신했다. 또 타고남은 이현상의 유골을 빨치산 토벌대장 이래 늘 쓰던 다니던 자신의 철모에 넣고 개머리판으로 빻아 화개장터 인근 섬진강 물에 뿌려줬다. 차일혁은 적장(敵將)이었던 이현상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일개 공비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치러줬다. 차일혁은 자신의 그런 행위가 장차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줄을 예감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쩌면 긴 세월 함께 ‘싸웠던 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차일혁의 ‘일탈(逸脫)된 행동’에 동료들도 부하들도 만류했다. 하지만 차일혁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차일혁의 전공과 뛰어난 지휘능력을 시기하며 좋게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차일혁의 약점을 잡았다며 속으로 쾌재(快哉)를 불렀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적극 활용했다. 실재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차일혁은 그것을 깨끗이 감수하며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한 시대의 초인(超人)은 그렇게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총부리를 겨누던 적도 존경했던 차일혁을, 왜 경찰 동료들은 존경하지 못했을까! 경찰사의 최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더 비극적인 것은 그런 ‘차일혁의 올곧은 정신’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슴이 시리도록 슬플 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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