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0]군정에서 민정으로···박정희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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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1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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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0)

  • 제5장 재계활동 - (85) 공화당(共和黨) 입당(入黨)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5·16 이후 1년 8개월이 지난 1963년부터 민정이양(民政移讓)을 위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민주당(民主黨) 정권(政權)이 무너진 뒤의 군사통치를 끝내는 민정복귀(民政復歸)이므로 자연 민주당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하였고 반면에 자유당 세력은 4·19 때에 맞은 서리로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의 구파(舊派)가 부각되는 한편 과도정부의 수반(首班)이었던 허정(許政)과 윤보선(尹潽善)이 자못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1962년 2월 27일의 정쟁법(政爭法) 해금(解禁)으로 많은 정당들이 난립하던 중에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출마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4·8 성명(聲明)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돋아나는 정당(政黨)의 홍수, 야당의 난립 징후는 정당에 대한 혐오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는 데가 있었으며 재야(在野) 정치인들은 군사정권을 과신(過信)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데서 여러 모로 함정에 빠지고 있었다.

한편 신당법(新黨法)은 군사정권의 계속 집권을 위한 정략성(政略性)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고, 특히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출마 여부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야당 난립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정(軍政) 측에서는 1962년 5월경부터 막대한 자금과 관권을 동원하여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사전에 조직하고, 거기서 자신이 생기자 1963년 1월 ㅂ일부터 민간인의 정치활동도 허용한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목당은 이 무렵 정구영(鄭求暎)으로부터 공화당 입당을 권고받고 있었다.

목당은 해방 후 주변환경에 따라 한때 한민당(韓民黨)에 적을 두었음은 앞에서 보았거니와, 이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가 이끄는 정당에 행동을 같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고, 주변 사람들도 그런 그의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그는 민주당원(民主黨員)이 되었고, 야당계(野黨系) 정치인들과의 친교(親交)도 많았다.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있던 그들 재야 정치인들이 민정당(民政黨)을 만들고, 신민당(新民黨)을 새로 조직하였다. 민정당엔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이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 앉고, 신민당에는, 동생 호(湖)가 최고위원 허정을 도와 일하고 있었다. 이들 재야세력(在野勢力)은 모두 군정 반대투쟁을 목표로 했다.

목당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한 정당 가입이라면 어디든지 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구정치인(舊政治人)들의 규합체인 재야 정당에의 가입은 목당으로선 흥미가 없었다. 그는 구정치인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활동과 경제활동을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움직이는 폐단이 있었던 것이다. 즉 정경일체(政經一體)의 관념이 결여되어 실업인(實業人)들을 옛날의 잘돌뱅이 취급하는 그들의 태도가 목당으로선 몹시 못마땅했다.

해방 후 우리의 국가건설(國家建設) 노력은 너무도 정치중심적(政治中心的)으로만 움직여 정치가 흔들리면 경제도 따라서 흔들리는 체질을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경제를 중시하는 실천정치(實踐政治)의 바탕이 이루어질 때 이 나라의 정치·경제는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목당으로선 기성 정치인 그룹에 끼여들고 싶지는 않았다. 목당은 그동안 최고회의 자문위원으로 그들과 접촉을 가지면서 군사정권(軍事政權)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모든 결정에 과단성(果斷性)이 있고 행동적이어서 우선 비생산적인 구정치인 집단과는 달랐다. 이들이 실천인들인데 비해 기성정치인(旣成政治人)들은 화이부실(華而不實)로 행동이 뒤따르지 않았다.

물론 군사정권 담당자들도 단점이 있었다. 독선(獨善)에서 저질러지는 부정과 부패가 그것이었다. 그 독선과 오만을 견제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생산적이고 능률적인 정치집단(政治集團)이요,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입당을 권하는 정구영에게 목당은 양식있는 재야 지도급 인물들이 많이 입당하여 젊은 군인들을 마구 놀아나지 않도록 견제세력을 조성할 수만 있다면 공화당은 훌륭한 정당이 될 것이라면서 넌지시 입당 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리하여 목당은 당무위원 정구영의 추천으로 공화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목당은 공화당 입당만은 항시 신변 일을 상의해 오던 나익진(羅翼鎭)에게도 숨겼다. 목당이 그에게 박 의장의 행동성과 경제 복구의 의지(意志)를 믿는다고 말한들 입씨름으로 끝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목당으로서는 그래도 신념이 있어 결정한 행동이었다.

목당의 공화당 입당을 권고해 온 사람중엔 정구영 말고도 또 한사람 정태성(鄭泰成)이 더 있었다. 정구영이 김종필 주류파(主流派)가 받드는 인물이라면 정태성으 주류파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이 목당의 집을 찾고, 은밀히 무역협회 회장실로도 찾아와 입당을 설득하게 된 이면엔 박정희 의장의 천거가 있었던 것이다.

당초 최고회의가 임시방침(施政方針)을 세우기 위해 재야의 두뇌들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만난 박 의장은 목당의 인품을 높이 사고 있었던 듯했다. 일찍이 영천 이부자(李富者)의 네 형제 이야기도 들어 왔고 군 법무관(軍 法務官)으로 있던 이호(李湖)와 만난 일도 있는데다 목당을 대해 보니 미상불 범인의 기상이 아니어서 인상에 남았던 것이다.

원래 김종필(金鐘泌)은 공화당을 사전 조직할 때 민정 참여를 전제로 한 박정희-김종필의 세력 구축을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당원 포섭에 극히 신중했다.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포섭대상자의 성분을 조사 분석한 연후에야 입당 설득의 공작을 폈던 것이다. 재야의 많은 덕망 있는 인물이 공화당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김종필이 박 의장으로부터 목당을 천거받아 신원조회를 한 결과 문벌(門閥)이나 학벌, 덕망 할 것 없이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전력(前歷)에도 흠이 없었다.

정구영과 정태성이 나서서 목당의 입당을 극력 설득하게 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목당의 정계진출은 처음부터 관록을 인정받은 출범이었으며, 중앙당(中央黨) 당무위원으로 정당법 성안(政黨法 成案)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영·미·일의 정당법에 조예가 깊었고 국내 정치풍토에 대한 예리한 비판안(批判眼)도 가지고 있었다.

정당은 정책대결의 집단이어야 하며 우리나라 현실로 보아 선거는 공영제(公營制)가 바람직하다. 그리고 정당의 운영은 당원들의 출연(出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당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새로운 선거법(選擧法)이 나온 것이다.

목당은 새 선거법은 나무랄 데 없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법대로만 운영된다면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릴 것으로 확신했다.

목당의 인품이 더욱 두드러지게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공화당에 몸담고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5년 동안의 시기였다. 김종필의 독주가 빚어낸 사전조직(事前組織)과 4대 의혹사건(疑惑事件)에 의한 공화당의 분열 김종필파와 김성곤(金成坤)·김진만(金振晩)·길재호(吉在號)·백남억(白南檍) 4인조의 격돌로 인한 공화당의 난항(難航), 박 의장의 번의파동(翻意波動)과 김(金)·대평(大平) 메모 사건이 몰고 온 정치폭풍 등으로 계속 격랑을 만나는 동안에 많은 정치인들이 희생되고 상처를 입거나 이름을 더럽혀야 했다. 그러나 유독 목당만은 그 어느 쪽에 기우는 일이 없고, 그렇다고 그 어느 쪽으로부터 비난 받는 일도 없이 든든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정치 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행해진 사전 조직은 막대한 자금 또한 극비리에 조달해야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증권파동(證券波動)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이었다.

군사혁명(軍事革命)이라지만 5·16 주체는 소수 장교들이 중심이었고 그나마도 박정희 의장을 구심점으로 했다는 것 말고는 이질적이기조차 한 주체들이었다. 내외의 도전과 불신이 그들을 휘몰아치는 가운데 통치 질서를 닦아 박정희-김종필의 실력체제는 구축되어 갔다. 그러나 군사통치(軍事統治)는 최고회의라는 기구를 통해 통치권(統治權)을 행사하는 것이었지만 주체들의 최대 숙제였던 군사통치 이후를 설계하는 일은 최고회의에서 다룰 수가 없었다. 최고회의는 군부 전체가 통치에 참여하는 형식을 갖춘 협의체(協議體)였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이 문제를 다루기엔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완수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 주체들의 공약(公約)이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최고회의 구성원들의 정치적 입장은 저마다 견해가 달랐다. 김종필은 처음부터 민정에 참여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보였고 물론 박 의장의 뜻도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주체들 속엔 초기 단계엔 원대복귀(原隊復歸)라는 공약에 성실해야 한다는 견해가 더 우세했고, 이런 분위기는 박 의장의 뜻을 흔들고 있었다.

김종필과 그의 막료진은, 그렇다면 박 의장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민간에 돌아간 통치권을 뒤에서 감시하고 지도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는 과제를 놓고 연구 검토했다. 하지만 해답은 “박 의장이 군복을 벗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 이외엔 통치권을 지도할 방법은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런 결론이 나자 김종필은 군정 주체가 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트기 위해 이른바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주저 없이 민정 준비를 밀어 붙였다. 그는 일을 추진하는 데 박 의장의 승인 이외엔 아무것도 고려에 넣지 않았다. 공화당의 사전 조직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수의 군정 주체를 소외시킨 가운데 극비리에 밀어붙인 민정 준비는 민정 수립을 위한 선거 단계에서 주체 내부의 심각한 불신과 대립의 요인이 되었다. 반 김종필 진용은 4대 의혹사건을 조사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법적인 사전 조직도 모두 깨버릴 것을 주장하는 등 김종필에게 포화가 집중됐다.

민정이양(民政移讓) 선언 - 군정 주체의 민정불참(民政不參) 선언 - 군정의 4년 연장안(延長案) 제시 - 다시 군정 주체의 민정 참여 - 라는 기복(起伏)은 박 의장이 스스로의 정치방향을 놓고 소수의 주역(主役)과 소외된 다수 주체의 치명적 분열 사이에 끼여 방황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박 의장은 그의 유일한 막료였던 김종필을 정치에서 물러서게 만들어야 했다.

김종필이 공직에서 떠나 자의우 타의우(自意牛 他意牛) 외유의 길을 떠난 것이 1963년 3월 25일이었고, 후임 당의장(黨議長)에 정구영이 앉았다. 한편 박 의장의 군정연장(軍政延長) 성명으로 벌어지는 재야 정치인들의 군정 반대 데모는 서울대생들의 데모로 이어졌고 미 국무성(美 國務省)은 두 번째의 민정이양 촉구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민정이양은 부득이했다. 내외의 압력은 박 의장으로 하여금 4월 10일에 가서 연내 민정이양이 가능하다고 언명하게 만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화당 해체를 보류하고 박 의장은 김종필이 설계하고 다져놓은 조직을 이끌고 민정가도(民政街道)를 달리기 시작했다. 김종필은 박 의장의 정치적 진로를 일찍 닦아 놓은 셈이었다.

10월 15일, 박정희 후보는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정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거둔 승리는 박 의장의 승리이자 김종필 플랜의 결실이었다. 이에 김종필은 10월 23일 귀국했고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당의장으로 복귀했다.

정구영은 당고문(黨顧問)이 되어 뒷전으로 물러앉았으나 김종필은 국회의원 후보자를 추천하고 총선거를 이끌어가면서 정구영의 의견을 구했다. 김종필이 의장으로 복귀해 보니 그가 조직한 공화당은 그가 자리를 비운 7개월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지만 다행히 사전조직 멤버들이 그대로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를 보일 수 있었다. 김종필은 입후보자 명단을 들고 박정희 총재를 찾아가기 전에 정구영 고문을 먼저 찾아가 협의를 구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목당은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입후보 등록이 끝나자 곧바로 대구도당(大邱道黨)으로 내려와 영천 지구 대통령 선거 대책위원장으로 선거전(選擧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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