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87]혁명정부 ‘수출우선주의’ 기간국책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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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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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87)

  • 제5장 재계활동 - (82) 회심의 미소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다녀오자 최고회의 자문위원 위촉장이 날아들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최고회의에서 역설했던 자유무역론(自由貿易論)이 그들에게 먹혀들어갔음을 직감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기성관념에 사로잡힌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겐 마이동풍(馬耳東風)이던 자유무역 국책론(自由貿易 國策論)이 그들의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때묻지 않았음을 말하며 참신한 정치를 기대케 하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앞서 5개 경제단체 연석회의에서 혁명 지지(革命 支持)에 대한 성명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는데 건의서(建議書)를 제출하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었다. 목당은 회장단 회의를 소집하고 5·16혁명 지지성명서의 발표를 회의에 제의했다. 부회장 이동환(李東煥)은 혁명 주체와 연줄이 있어서 혁명위원회의 동향에 밝았고 시국이 혁명을 기정사실화 시키는 일이 시급한 처지이므로 5·16 혁명을 받아들이기로 해야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지지성명(支持聲明)을 내는 것이 바람직했다.

의견이 모아지자 유형극(柳炯極) 상무이사가 즉각 초안(草案)을 작성해 지체없이 신문 게재를 서둘렀다. 마침 부회장 이동환이 출타중이어서 오학근(吳學根) 전무와 이활 회장의 결재를 거쳐 이동환 부회장의 동의는 그가 나타나는 대로 얻기로 한 채 우선 신문 보도를 의뢰했다. 이리하여 경제단체로서는 제일 먼저 성명이 나갔다. 이동환 부회장도 뒤에 물론 동의했거니와 그는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협회를 떠나 임지인 일본으로 건너갔다.

최고회의는 5월 23일에 가서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해산하는 포고를 발표했다. 이날 용공분자(容共分子) 2000여명, 깡패 4200여명을 검거했다는 발표도 함께 있었다. 정치·사회의 정화작업(淨化作業)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구정권(舊政權) 하에서 공직(公職)에 있던 자나 부정축재자를 공직기관(公職機關)에서 추방할 것을 결정한 최고회의는 각 경제단체에도 이를 시달하여 무역협회에도 시달이 전달 됐다. 6월 18일, 목당은 임원회(任員會)를 소집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구정권하의 공직기관원에 대한 재신임을 물어야 된다는 시달이 있어 임원 개선을 위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임원회를 소집했다는 목당의 개회사에 이어 토의에 들어가 개선(改選) 범위를 회장단으로 한정할 것인가, 이사와 감사 등 전임원에까지 확대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일산업(大一産業) 김원우(金遠瑀)는 “오늘까지의 협회는 거의 특권층에 농락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니만큼 임원의 전원 사퇴가 마땅하다”고 동의했고 전진산업(前進産業)의 심상은(沈相殷)이 이에 재청하여 일단 총사퇴를 하고, 소집되는 임원총회에서 재선임하기로 가결을 보았다.

이리하여 다음날인 6월 19일, 즉시 임시총회가 소집되었다. 임시의장(臨時議長)이 지명한 9인의 전형위원이 60명의 신이사(新理事)를 선출하고 신임 이사들로 구성되는 이사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상무 포함) 및 상임감사를 선출하기로 하였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 선출된 임원진(任員陣)을 보면 다음과 같다.

회         장   이  활
회원부회장   오정수(吳楨洙, 한국무역진흥(韓國貿易振興))
                 심상은(전진산업)
                 곽동선(郭東善, 남방물산(南方物産))

즉 상근부회장 이동환, 전무이사 오학근은 유임되고 회원 부회장이 심상은과 곽동선 등이 새 얼굴로 등장한 것이다. 딴 경제단체에는 한바탕 바람이 불었으나 무역협회는 이렇게 운영진(運營陣)이 모두 유임된 것이다. 그후 이동환 부회장의 사임에 이어서는 한상원(韓相元)이 들어왔다.

무역협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정부(對政府) 건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이슈는 대부분 보세가공(保稅加工) 수출 조성에 관한 것이었다.

‘5월 26일 보세가공 수출 조성에 관한 건의

제출처·· 최고회의(最高會議) 재정(財政)·상공분위(商工分委), 재무장관(財務長官), 상공부장관(商工部長官), 한은 총재(韓銀 總裁)

유휴 노동력이 풍부하고 임금이 저렴한 우리나라는 가공수출 무역에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였으므로 보세가공무역 장려를 위한 정책을 시행해 줄 것을 건의하였고 주요 내용의 대부분은 채택되었다.


5월 31일 무역정책(貿易政策)에 관한 건의

제출처·· 최고회의의장(最高會議議長) 기획위원장(企劃委員長), 상공(商工)·재무(財務)·부흥·(復興)·농림분과위원(農林分科委員), 기획위원회경제분과위원(企劃委員會經濟分科委員), 상공·재무·부흥·농림부장관, 해무청장(海務廳長), 한은 총재(韓銀 總裁)

첫째, 기본시안(基本施安)

(1) 경제시책중 수출진흥(輸出振興)을 최우선 순위(崔優先 順位)에 둘 것.
(2) 장기 수출산업 발전계획(長期 輸出産業 發展計劃)을 수립하여 줄 것.
(3) 실효성 있는 수출 진흥 정책을 시행해 줄 것.
(4) 수출장려지대를 설립하여 집중적 장려조치를 해줄 것.
(5) 복수환율제(複數換率制, 한 나라의 환율정책상의 필요에서 단일 형태의 환율을 택하지 않고 복수적 환율 체계를 갖는 (換 제도)를 실시해 줄 것.
(6) 수출시장 개척을 위한 제사업을 적극화해 줄 것.
(7) 경제외교(經濟外交)를 강화하여 줄 것.

둘째, 보세가공무역(保稅加工貿易)의 개척

자원(資源)과 자본(資本)이 부족한 반면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하므로 이들을 움직여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동가공무역(同加工貿易)을 적극 장려해 줄 것.

셋째, 법의 제정 및 개정

무역의 원활, 특히 수출진흥을 이룩하기 위하여 강력한 행정이 필요한 바 이를 법적 근거 밑에 이룩할 수 있도록 새로운 법의 제정과 현행법을 개정 보강해 줄 것.

넷째, 기타 사항’


목당이 협회 활동을 통해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이 이때이다. 혁명정부(革命政府)가 개방주의를 채택하여 산업자본가들을 채찍질해서 차관 도입을 통한 기간산업(基幹産業) 건설에 나섰다는 점과, 수출 우선주의(輸出 優先主義, 제1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는 점, 보세가공(保稅加工) 수출에 적극성을 보인 것 등은 획기적인 경제정책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기간목표(基幹目標) 없이 우유부단한 경제시책을 일삼아 온 구정권(舊政權)들이었고, 그들에겐 먹혀들어가지 않던 정책이 실현을 보게 되었으니 목당으로선 기적을 보는 것 같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밑에서 한국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과 발전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시대를 열었다.

1961년은 군사혁명으로 비로소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연 정치적 격동의 해였다. 대외 경제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특히 대일무역(對日貿易)의 계속적인 신장과 해외시장 수요의 견실(堅實)을 반영하여 수출이 괄목할 만한 증가를 나타냈다. 한편 수출 상품구조도 철광석·중석 및 생사(生糸) 등 1차 산품 또는 광산물에서 합판·의류 등 경공업 제품의 등장으로 개선되면서 점차 교역조건(交易條件)이 유리한 방향으로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그 다음해인 1962년을 기점으로 제1차 년도에 들어가 투자수요(投資需要)가 증대되었고, 과거 몇 년 동안 2000만달러를 약간 웃돌던 수출은 1962년엔 5700만달러 선에 달함으로써 1945년 이래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이래의 정체(停滯)에서 깨어나 비교적 높은 성장을 보인 것이다.

외국 차관(外國 借款)에 의한 설비 투자가 활발해진 것은 1963년에 가서였는데, 상품 수출은 8680만달러에 달하여 수출목표액을 초과 달성하였고 보세가공과 가공수출(加工輸出)의 증대로 공업제품의 수출비중이 현저히 증가해 갔다. 이로써 한국 경제의 향방은 확실해졌고 자유무역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목당으로선 감회가 깊었다. 그가 런던대학에서 신설된 학과인 경제연구과(經濟硏究科)에 적을 둔 것은 경제학보다는 실용 경제정책을 배움으로써 조국이 광복되는 날의 경제입국책(經濟立國策)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는 학문이 학문으로 끝나는 경제학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찾아낸 것이 자유무역이었다.

무역협회가 경제입국을 위한 정책건의(政策建議)를 한 것은 5·16 후의 무역정책에 관한 건의가 처음이다. 수출우선주의(輸出優先主義)는 기간국책(基幹國策)이 되었고 이 나라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성공이요, 목당의 승리였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목당은 1963년 2월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창당(創黨) 멤버로 공화당에 입당하는데 정치풍토의 혁신으로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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