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바다와 호수의 경계 위에서 달 그리고 연꽃을 만나다

원철 스님
[원철 스님/ 전(前) 조계종연구소장
    ]
 
오랜 세월동안 모래톱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면서 바다와 호수 사이에 경계선이 생겼다. 어느 날 바다와 호수는 완전히 나눠졌다. 큰집인 바다와 분가하면서 작은 집 호수는 나름의 살 길을 찾았다. 우선 바다를 최대한 이용했다. 수면 아래 모래사이로 염분이 오갔다. 민물과 짠물이 섞이면서 양쪽 물 모두에서 살 수 있는 어류와 식물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후 바다와 호수의 장점을 살리면서 독립에 성공했다. 그런 호수를 지리책에서는 석호(潟湖)라고 부른다. 강릉 경포호 같은 유형을 열거하자면 인근 속초의 영랑호, 고성의 화진포 송지호 등이 있다.
 
하지만 호수의 독립에 가장 환호한 것은 동식물류가 아니라 자칭 문화인들이다. 왜냐하면 바다와 호수 두 경관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파도가 격렬하게 치는 날에도 호수는 고요했다. 거울같이 맑고 고요하다고 경호(鏡湖) 혹은 감호(鑑湖)로 불렀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호(賢湖) 군자호(君子湖)로 불렀다. 같은 호수인데도 불가(佛家)에서는 경호 감호라 했고 유가(儒家)에서는 현호 군자호라고 불렀다. 바깥세계는 번뇌가 불같이 일어나도 내면세계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호수의 이미지에 양가(兩家)가 경쟁적으로 찬사를 쏟아냈던 것이다. 게다가 시인은 시로써 찬탄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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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현판과 실내 제일강산 편액/사진 필자 제공]

 
정철(鄭澈 1536~1594)은 〈관동별곡〉에서 ‘경호는 물이 맑고 잔잔해 모래알을 셀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8자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가며 ‘경호팔경’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시(漢詩)를 모아 세운 돌비석 14개와 한글시비 10개가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대형 정자 안에 걸린 작은 현판은 11개이며 안팎으로 걸린 대형현판은 3개나 된다. 임금 작품 두 점,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1558~1624)의 글씨 한 점 그리고 나머지는 재지사족(在地士族 지역선비)의 글이다. 물론 한문비석과 현판의 저자의 일부는 겹친다. 거기에는 외가가 강릉인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이 10대 때 썼다는 ‘경포대 부(賦)’도 포함된다. 강릉김씨의 시조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626~681)의 후손인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主元)의 능도 관내에 있다. 또 경주에서 해안선을 따라 많은 귀족들이 옮겨오면서 서라벌 문화가 함께 따라온 영향도 적지 않다 할 것이다. 강릉지역의 문화파워는 이 모든 것의 총합이라 하겠다.
 
가장 빠른 기록에 의하면 경포대 정자 건물은 고려말 1326년 신축한 것이다. 원래 자리는 현재 부지에서 직선거리 700m지점에 있는 방해정(放海亭)이라고 한다. 그런데 방해정은 인월사(印月寺)라는 사찰터에 지어졌다. 대문 옆에 ‘인월사터’라는 표지석을 세워 건물의 역사적 연계성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망이 매우 좋은 언덕 위 현재의 자리로 경포대 건물을 옮긴 것은 1508년 무렵이다. 가로세로 5칸의 대형건물이다. 내부는 3단처리를 했다. 1899년에 내부 증축을 했다. 1단은 기존 바닥마루다. 2단은 경포호수 쪽으로 약간 높게 따로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2단 마루 양끝에 3단의 다락마루방을 설치했다. 남쪽방은 득월헌(得月軒) 북쪽방은 후선함(候仙檻)이라 불렀다. 달과 선녀를 기다린다는 낭만적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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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삼단 마루/사진 필자 제공] 

 
그 이전에도 누각에 온실(溫室 따뜻한 방)과 양실(凉室 시원한 방)을 만들었다. 방문한 문인(文人)과 달사(達士 도인)들이 놀려왔다가 아예 눌러 앉아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지라 결국 철거했다고 한다. 필자도 다락방 한 귀퉁이에서 책상다리를 한 채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호수와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상념하는 여유를 누렸다. 처음 신축한 이유가 언덕 위 빈터에 올라와 호수를 감상하던 이들에게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매우 곤혹스런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찾는 이를 편안히 머물게 하려는 용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하겠다. 지나친 독점을 막고 모두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혜와 교양이 계속 발휘된 셈이다.
 
경호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다섯 개 달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늘에 비친 달, 바다에 비친 달, 호수에 비친 달, 술잔에 비친 달, 님의 눈에 비친 달이 그것이다. 그 지역에 있는 사찰 역시 인월사(印月寺)라고 불렀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즉 다섯 개의 달 정도가 아니라 일천개의 강에 비친 모든 달을 볼 수 있다는 의미까지 더했다. 인월사는 이웃의 선교장에 생활기반을 둔 지역유지가 방해정을 지으면서 그 위세에 밀려 인근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2023년 봄에 대형산불이 태백산맥을 휩쓸었을 때 화마를 입었다. 그 때 경포대 안의 보물급 현판들도 인근 박물관 수장고로 옮겼다가 잔불까지 정리한 뒤 제자리를 찾아왔다. 소방인력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경포대 건물도 무사히 지켰다. 2026년 3월 새 사찰도 완공했다. 유명건축가의 설계로 인하여 건축대상을 받으면서 sns명소라는 입소문을 타고서 집 구경하려 오는 발길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릉답사를 함께 한 일행들이 떠나면서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코스로 경포호 옆 ‘가시연 습지’를 찾았다. 가시연은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분류된 희귀종이다. 게다가 강릉은 가시연 북방 한계선이라고 한다. 1960년대 농경지를 넓히면서 호수주변 습지를 메웠다. 그 때 가시연 자생지도 함께 없어졌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자연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습지 역시 그 필요성에 따라 복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시연꽃 씨앗이 발견되었다. 7년간의 현대농업기술을 총동원하여 2012년 발아시키는데 성공했다. 반세기만에 다시 등장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군데군데 가시가 뾰족뾰족 솟은 연잎은 엄청 큰 넓이를 맘껏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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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는 가시연 꽃말이 적혀있다/사진 필자 제공]

 
알고보면 연꽃의 생명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경남 함안의 연꽃은 수백년만에 다시 꽃을 피웠다. 2009년 성산산성에서 연꽃씨앗이 발견되었다. 700년 전 고려씨앗을 2010년에 발아시킨 것이다. 환경적응에 따른 자연적 변화와 인위적인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 않는 원형 그대로의 고려연꽃을 넓디넓은 연밭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함안땅 옛 아라가야의 도읍지에서 출토되었기에 ‘아라연꽃’이라 명명했다.
 
하루를 마감하는 해가 서쪽으로 느엇느엇 질 무렵 돌아나오는 습지입구에는 가시연의 꽃말이 적혀있다.
“그대에게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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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는 가시연 꽃말이 적혀있다/사진 필자 제공]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전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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